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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적이라는 것

bindol 2022. 7. 22. 04:10

인간적이라는 것

중앙일보

입력 2022.05.27 00:38

최진석 서강대 철학과 명예교수·새말새몸짓 이사장

 

“인간적”이라는 말을 따져보자. 그러려면, 가장 밑바탕에서 인간이 어떤 존재인지를 먼저 해명해야 할 것이다. 누가 뭐래도 인간은 가장 근본적인 의미에서 문명을 건설하는 존재이다. 인간을 이보다 더 근본적인 차원에서 설명할 수 있다면, 누구든지 말해보기 바란다. 불가능할 것이다. 호모 에렉투스(homo erectus), 호모 파베르(homo faber), 호모 폴리티쿠스(homo politicus), 호모 루덴스(homo ludens) 등도 모두 문명을 건설하는 활동들의 특징을 잡아 규정되었다. 그렇다면, 인간은 뭘 가지고 문명을 건설하는가? 생각이다. 우주선도 생각의 결과이고 칫솔도 생각의 결과이며 민주주의, 사회주의, 철학, 과학 어느 것도 생각의 결과로 태어나지 않은 것이 없다. 문명을 건설하면서 사는 사람은 생각하고, 문명을 수입해서 사는 사람은 생각하지 않는다. 생각이 있느냐 없느냐가 문명적인 삶의 높낮이를 결정하는 잣대이다. 생각은 말이나 문자나 숫자나 음표로 표현되므로 문명은 말이나 문자나 숫자나 음표로 조직되어 있다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문명을 읽는 높은 시선을 가진 사람은 말이나 문자나 음표나 숫자를 다루는 데 능숙하다. 이것들이 효율성을 극대화할 수 있도록 질서와 체계를 갖추면 우리는 그것을 지식이라고 한다. 여기서 또 지식의 생산자인가 수입자인가로 문명의 주도권을 갖느냐 못 갖느냐가 결정된다. 문명에서 주도권을 굳이 가지려고 할 필요가 있느냐고 다소 경박하게 말할 수도 있다. 그렇다면, 덜 주체적이고, 덜 독립적이며, 덜 자유스러운 삶도 자기 삶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아Q로 살아도 괜찮다고 말해야 한다.

인간은 문명을 건설하는 존재
그 문명은 신뢰를 통해 유지돼
그 신뢰는 염치가 있어야 지켜져
양심·염치·수치심을 먼저 배워야

여기서 한 걸음 더 들어갈 필요가 있다. 문명이 말이나 문자나 숫자나 음표로 조직되어 있다면, 문명의 확실성이나 견고성은 무엇이 지켜주는가? 어차피 이것들은 신이 내려준 것이 아니라 우리끼리 그것을 지키자고 한 약속의 체계이므로, 약속을 지키는 것은 가장 기초적인 의무가 된다. 약속을 지키는 것은 이제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자신이 인간으로 존재하는 이유가 되는 정도로 절대적이다. 이처럼 문명의 견고성을 지켜주는 것은 신뢰이다. 신뢰는 문명의 주춧돌이다. 춘추전국 시대를 평정하고 소위 천하를 통일한 진나라는 당시 시대가 요구하는 개혁을 성공시킴으로써 나라의 효율성을 극대화하여 국력을 키웠다. 천하를 통일할 힘을 가지게 한 근원적인 힘은 무엇이었을까? 바로 상앙(商鞅)이란 재상이 출현하여 진나라 전체에 신뢰의 기풍을 회복한 것이었다. 진나라에게 패배하여 천하통일의 제물이 되었던 다른 나라들도 개혁을 시행하였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제도나 정책의 숨구멍이 신뢰임을 아는 능력이 없었기 때문이다. 사실 화폐제도, 정당제도, 교육제도, 법률제도, 의회제도 등등도 문명의 한 형태인 이상 모두 ‘신뢰 제도’이며 신뢰가 지켜져야만 유지될 수 있다. 신뢰가 무너지는 것과 동시에 문명은 길을 잃는다.

그렇다면, 신뢰를 지키게 하는 가장 근본적인 강제력은 또 무엇일까? 제도일까? 규정일까? 이익일까? 모두 제한적인 역할만 할 수 있을 뿐이다. 외부적인 그것들이 아니라 내부적인 염치이다. 염치는 신뢰를 안타까운 마음으로 어루만지는 매우 민감한 자각 능력이다. 수치심을 느끼고 부끄러움을 아는 것이다. 염치를 모르거나 부끄러움을 느끼는 민감성이 없으면, 제도나 법은 어느 정도의 세력만 갖추면 얼마든지 멋대로 이용할 수 있다. 우리는 이런 경우를 이미 많이 봤다. 진영의 이념을 지키기 위해서 자신을 인간으로 살게 하는 힘이자 문명의 지킴이인 염치를 포기한다면, 격을 갖춘 인간으로 자신을 지켜내기 어렵다. 자신을 지키는 일에 실패하는 데 머물지 않고, 사회의 진보를 뒤틀고 막아 버린다.

검찰개혁 문제로 온 나라가 시끄러울 때, 어느 국회의원이 위장 탈당을 해서 안건조정위 위원 숫자를 억지로 맞춰 당론을 관철한 사례가 있었다. 제도를 지켜주는 울타리인 신뢰를 무너뜨렸다. 우리는 여전히 이것을 정의라고 공개적으로 칭송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은 수준을 살고 있다. 이렇게 눈을 질끈 감고 제도와 법이 주는 작은 승리는 얻었을지 몰라도, 제도와 법의 토대를 허무는 반문명적인 큰 패배를 자초하였다. 진영의 노예가 되어 염치를 아는 더듬이가 부러져서 향원으로 전락한 결과다. 이렇게 되면, 무엇이 부끄러운 일이고, 무엇이 명예로운 일인지 알 길이 없으니, 정치는 조타수 없는 배와 다를 바 없게 된다. 정치가 그러하면, 나라가 그렇게 된다.

왜 지식인들이 쉽게 부패하는가? 왜 창의적 기풍이 더딘가? 왜 정치가 줄곧 실패하는가? 왜 진영에 갇혀 꼼작 못하는가? 왜 천박해지고도 당당한가? 무슨 일을 하든지 간에 사전에 먼저 배웠어야 할 것을 배우지 못했기 때문이다. 양심, 염치, 수치심 등과 같은 ‘인간적인 것’들이다. 이런 보물들이 담긴 상자가 바로 생각하는 능력이다. 인생 짧다. 잠시 멈춰서서 하늘을 올려다보며 인간적으로 살다 가는 일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자.

 

 

최진석 서강대 철학과 명예교수·새말새몸짓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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