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 크기-잔챙이는 가라
최진석 서강대 철학과 명예교수·새말새몸짓 이사장
차를 몰고 도로를 달리다가, 누군가 급히 끼어드는 바람에 깜짝 놀랐다. 이런 경우에 어떤 사람은 브레이크를 살짝 밟아서 들어오기 편하게 거리를 벌려주지만, 어떤 사람은 경적을 세게 눌러 항의를 하고, 심지어 어떤 사람은 그 차를 앞질러가서 막고 주먹질을 해대기도 한다. 반응이 제각각인 것은 농도가 다른 정의감 때문이 아니라 마음의 크기가 달라서일 것이다. 마음이 크면 그냥 빙긋 웃고 말지만, 마음이 작으면 끼어들기로 놀란 것을 자기 자존이 무너진 것 정도로 받아들이고 분노를 견디지 못한다. 정의감이나 진위 판별 능력 혹은 선악에 대한 민감성 정도에 따라 태도가 달라진 것이 아니다. 다시 생각해봐도, 마음의 크기 때문이다. 세상을 위해 공적으로 공헌할 수 있는 사람은 급히 끼어드는 사람에게 거리를 벌려주는 사람이지, 주먹질을 해대는 사람은 아니다. 마음의 크기가 공적 역할의 수준도 결정하는 법이다.
코로나라는 단어를 들어도 연상하는 것이 다 다르다. 누군가는 방역하는 모습이나 구급차를 떠올리고, 누군가는 코로나 바이러스 이미지를 떠 올리고, 어떤 사람은 코로나 바이러스 RNA 염기서열을 떠 올린다. 시선의 높이가 삶의 높이다. 시선이 높으면 마음도 커질 수 있고, 시선이 낮으면 마음이 작아지기 쉽다. 시선이 높아서 RNA 염기서열을 떠올릴 수 있는 사람이라야 백신을 개발하거나 코로나 바이러스를 퇴치하는 등의 지배적인 역할을 할 수 있다. 마음의 크기는 시선의 높이와 매우 잘 연결되어 있다. 전술적인 높이의 시선은 전술적인 크기의 마음을 줄 수 있고, 전략적인 높이의 시선은 전략적인 크기의 마음을 줄 수 있다.
마음이 크면 더 지혜롭게 판단하고
마음이 작으면 신뢰도, 덕도 없어
각성없이 작은 마음에 갇혀선 안돼
지혜의 궁극은 건너가기이다. 왜 그런가? 세상이 찰나의 멈춤도 없이 계속 변하기 때문이다. 변화의 정방향을 따라 건강하고도 효율이 높은 반응을 하는 방법은 세계의 변화에 맞춘 건너가기 하나뿐이다. 세계는 건너가기를 그치지 않는데, 세계에 반응하며 살아야 하는 사람은 간혹 이념화된 성공기억이나 작은 확신에 갇혀 건너가기를 멈춘다. 건너가기를 못하는 이유는 근본적으로 무지해서이다. 무지하면 진짜와 가짜를 구별하지 못하고, 익숙한 가짜를 진짜라고 확신하고 집착한다. 그러면 아직은 알려지지 않은 곳, 익숙하지 않은 곳, 해석되지 않은 미래로는 한 발짝도 떼지 못한다. 정의롭지 않아서가 아니라 마음의 크기가 작아서이다.
익숙함에 갇혀서도 그것을 편안하게 여기는 것은 작은 마음 때문이고, 집요하게 숙고하고 정확하게 판단하여 아직 이해되지 않은 곳이지만, 그곳으로 넘어가기를 감행하는 것은 마음의 크기가 넉넉하기 때문이다. ‘작은 확신’에 갇혀 이념화되면 마음은 쪼그라든다. 마음이 쪼그라들어 작아지면 수치심이 사라져 부끄러움을 모른다. 수치심을 알면 신뢰를 지키지 않을 수 없다. 신뢰가 인류 문명의 가장 근본적인 토대임은 매우 분명하다. 정부 조직, 금융 시스템, 교육 제도 등등 하나도 예외 없이 모두 신뢰를 토대로 한다. 자기 자식이 보고 있어도 꼼수를 부리거나 잔챙이처럼 행동하고도 그것을 정의로 포장할 수 있는 무모함은 어디서 나오는가. 마음의 크기 때문이 아니라면 무엇이겠는가. 신뢰만큼은 포기하지 않겠다는 정도로 마음이 커 있지 않으면, 개인이든 나라든 모두 위태롭다.
가장 위험한 것은 각성하지 않은 정의감이다. 각성은 전격적인 건너가기이다. 쪼그라진 심장과 작아진 마음이 영토를 넓혀 새로워지고 커지는 일이다. 각성은 그래서 마음의 크기를 키우는 일이다. 각도를 달리하면, 마음의 크기가 큰 사람만 각성할 수 있다고 말해도 된다. 문명 안에서 생산적인 진화의 결과들은 모두 각성의 통로에서 빛난다. 나무도 각성해야 꽃을 피운다. 각성하지 않은 정의감이 진화와 진보를 막는 것임은 분명하다. 그래서 공자도 “리더가 자잘해서야 되겠느냐!”(君子不器)고 일갈한 것이다. 그는 또 각성 없이 작은 마음에 갇혀서 진영의 우두머리 행세를 하는 향원(鄕原)으로 살지는 말자고도 한다. 향원은 “덕의 파괴자”(德之賊也)이기 때문이다. 한 사람의 존재성을 보편의 경지로 끌어올릴 수 있도록 준비된 내면의 힘이 덕(德)이다. 한 사람을 이념의 수행자나 진영의 지지자로 살지 않고 바로 그 사람으로 살게 하는 힘이다. 덕이 힘을 받아야 낡은 정의감이나 이념에 갇힌 자잘한 향원이라도 수치심을 되찾고 각성할 수 있다. 이렇게 보면, 마음의 크기는 결국 덕이 기지개를 켜는 마당이 되는 격이다. 마음의 크기가 작으면, ‘덕’의 마당도 작다. 마음의 크기가 커야 덕이 있고, 마음의 크기가 작으면 ‘덕’도 없다. 창의성도 마음의 크기가 좌우한다. 유일하고도 비밀스럽게 내장해 있는 나만의 궁금증과 호기심이 물러서지 않고 세상으로 뻗어 나가 실현된 것이 창의다. 이것은 ‘덕’의 활동성에 가깝다. 당연히 마음의 크기가 작고 심장이 쪼그라져 있는 향원들에게는 일어날 수 없는 일이다.
이쯤에서 나는 이제, 이 시대에, 신동엽의 “껍데기는 가라!”를 다 읽고 말한다. “잔챙이는 가라!”
최진석 서강대 철학과 명예교수·새말새몸짓 이사장
'column-2'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정재학 칼럼] 백척간두에서 탈출하는 법 (0) | 2022.07.22 |
---|---|
지적 호전성 (0) | 2022.07.22 |
인간적이라는 것 (0) | 2022.07.22 |
야망과 필요와 감동 (0) | 2022.07.22 |
인위(人爲) 예찬 (0) | 2022.07.2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