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적 호전성
최진석 서강대 철학과 명예교수·새말새몸짓 이사장
물건-제도-사상 등 문명의 모든 것은 사람이 만들었다. 이것들은 다 질문의 결과이지 대답의 결과가 아니다. 그래서 질문하는 자가 세상의 주인 자리를 차지한다. 대답은 이미 있는 이론과 지식을 그대로 먹었다가 누가 요구할 때 그대로 뱉어내는 일이다. 대답할 때는 ‘원래 모습’을 손상하면 안 되기 때문에 공손하고 조심히 다뤄야 한다. 대답하는 자는 당연히 무엇인가를 떠받들면서 어질고 착하게 성장하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그러다 도덕 지향적인 사람이 된다.
질문은 자기 자신에게만 있는 고유한 궁금증과 호기심이 안에 머물지 못하고 밖으로 튀어나오는 일이다. 질문하는 자는 호기심이라는 화살을 무엇인가를 향해 거침없이 쏘는 자다. 이 ‘거침없음’이 없으면 질문도 없다. 거침없는 호기심은 대상을 파고드는 일이므로 속성상 공격적이거나 호전적인 특성을 띤다. 호기심이 튀어 나가는 일은 도덕으로 물드는 것 이전의 사건이므로 도덕적인 제어와 큰 관계가 없다.
그런 태도가 자유로운 경지를 보장
그게 없으면 도덕 추구하다 종속돼
세상을 자기 뜻대로 디자인할 필요
사람은 개념을 세워서 세상을 자기 뜻에 따라 정리하려는 욕망을 가지고 태어난다. 자기 뜻에 따라 정리하는 것을 전략이라고 한다. 세상을 자기 맘대로 디자인해서 살려는 자세다. 누군가 전략적으로 디자인해놓은 틀을 공손하게 지키며 사는 것은 전술이다. 전략은 독립적이고 자유로운 경지를 보장하고, 전술은 종속적 상황을 강요한다. 세상을 자기 뜻대로 디자인해서 사는 전략적 높이의 사람들은 공격적이거나 호전적이다. 좀 공손하게 표현하면 적극적이다.
‘오타쿠’라는 개념이 있다. 한 분야에 병적일 정도로 깊이 빠진 사람을 말한다. 병적으로 한 분야에 빠진 사람은 한국에도 있고 일본에도 있었지만, 일본에서는 이런 사람들을 개념으로 정리하였고, 한국에서는 하지 않았다. 한국에서는 나중에 ‘오타쿠’와 비슷한 발음을 찾아 ‘덕후’라고 따라 한다. 개념화는 문명의 기초이다. 개념화는 문명을 끌고 나가는 힘이다. 구체적으로 존재하는 현상을 자기의 뜻에 따라 개념으로 포착하는 일은 호전적인 태도가 없는 사람에게는 허용되지 않는다. 호전적이지 않은 점잖은 사람은 그냥 바라만 보다가 빌려 쓴다. 빌려 쓰고 빌려 쓰다가 종국에는 종속적 상황에 빠진다.
자신의 욕망에 따라 세상을 자기 뜻대로 디자인하려는 태도를 나는 ‘지적 호전성’이라고 부른다. 지적 호전성이 없이 빌려 쓰거나, 따라서 하거나, 무엇인가를 떠받들며 사는 사람들은 ‘착함’ ‘어짊’ ‘공손함’ 등등을 추구하는 ‘도덕 지향적’ 삶에 빠진다. 자신이 도덕적인가 아닌가는 별 상관없다. 그냥 도덕 지향적이기만 한다. 세계의 모든 일을 도덕을 중심으로 하여 해석하는 습관에 빠진다.
공자의 ‘인’(仁)도 지적 호전성을 발휘하여 공자가 자기 맘대로 ‘정한 것’이다. 공자의 ‘인’을 도덕적 자각 능력이라고 해보자. 통치자나 나라에 도덕적 자각 능력을 키워놓으면 그 나라는 부강해진다는 것이 공자의 원뜻이다. 공자의 시선은 국가의 부강에 있다. 그러나 빌려 쓰는 사람들은 태도가 도덕 지향적이기 때문에 나라를 부강하게 한다는 목적은 세속적이거나 천한 것으로 도외시해버리고, 그런 것과 상관없이 어질게만 살아야 한다는 당위에 빠진다. 도덕과 이익을 갈라치기 한 다음에 이익을 취하는 것을 수준 낮은 것으로, 도덕을 취하는 것을 높은 것으로 정해놓고 산다. 이익과 도덕을 단절시키는 이 촌스러움이 극에 이르면 종국에는 종속적 상황에 빠진다.
우리는 지식 수입국이다. 지식 수입국은 삶의 전략을 빌려다 쓴다. 반면, 지혜는 지식 생산에 관여하는 지적 능력이다. 삶의 전략에 관여한다는 의미에서 지혜는 속성상 호전적이다. 지적 호전성은 현실적 호전성에 관여한다. 지적 호전성이 없어서 개념을 못 만드는 사람이라면, 총도 만들지 못한다. 총 자체가 개념의 체계인 지식으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서양에서 지혜의 여신은 미네르바(아테나)이다. 미네르바의 상을 보셨는지 모르겠다. 완전 무장 상태이다. 갑옷을 입고, 투구를 쓰고, 방패와 칼을 들었다. 지혜의 여신이 완전 무장 상태인 것이 도덕적인 우리에게는 조금 낯설 수 있다. 서양에서 지혜는 크게 두 가지에 관여한다. 전쟁과 목공(산업)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지혜로운 성군으로 세종대왕을 꼽는다. 그래서 광화문에 동상도 세우지 않았겠는가. 세종대왕은 나라를 다스리는 통치자다. 현대에 와서도 대통령은 군 통수권자이다. 군 통수권자란 전쟁을 선포하고 강화를 맺는 일을 최종적으로 하는 지도자란 뜻이다. 광화문에 동상으로 세워진 세종대왕은 책만 보고 있다. 옆에 칼이 없다. 후손들이 세종을 대왕으로 해석하여 동상을 세우면서 원래 세종이 들고 있었을 칼을 치워버린 것은 무슨 연유에서일까? 머릿속이 도덕으로만 채워져 있기 때문이다. 칼을 놓은 왕은 왕이 아니다. 군대가 없으면 국가가 아닌 것과 같다. 우리는 어쩌다 칼을 차지 않은 왕을 성군으로 인식하게 되었는가. 쟈코메티의 ‘걸어가는 사람’을 보라. 발을 뗄 때 앞으로 기우는 몸. 살아 있는 사람이 갖는 지적 호전성이 읽히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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