中庸

中庸 / 제32,33장

bindol 2022. 7. 23. 05:03

<제32장>

唯天下至誠 爲能經綸天下之大經 立天下之大本

知天地之化育 夫焉有所倚 肫肫其仁 淵淵其淵

浩浩其天 苟不固聰明聖知達天德者 其孰能知之

 

 

唯天下至誠(유천하지성)이야
爲能經綸天下之大經(위능경륜천하지대경)하며
立天下之大本(립천하지대본)하며
知天地之化育(지천지지화육)이니
夫焉有所倚(부언유소의)리오
肫肫其仁(순순기인)이며
淵淵其淵(연연기연)이며
浩浩其天(호호기천)이니라
苟不固聰明聖知達天德者(구불고총명성지달천덕자)면
其孰能知之(기숙능지지)리오

오직 천하의 “지극한 정성됨”이 이어야 .
천하의 대경을 경륜할 수 있으며,
천하의 대본을 세울 수 있으며,
하늘과 땅의 화육을 알 수 있는 것이니,
어찌 의지하는 바가 있겠는가.
그 인은 지성되며,
그 깊음은 깊숙하며,
그 하늘은 넓고도 넓다.
진실로 정말 총명하고 성지를 지니어 하늘의 덕에 이른
사람이 아니고야
그 누가 그런 것을 알 수 있겠는가.



<제33장>

詩曰衣錦尙絅 惡其文之著也 故 君子之道

闇然而日章 小人之道 的然而日亡

 

 

詩曰衣錦尙絅(시왈의금상경)이라하니
惡其文之著也(오기문지저야)라
故(고)로 君子之道(군자지도)는
闇然而日章(암연이일장)하고
小人之道(소인지도)는
的然而日亡(적연이일망)하나니

시경에, “비단 옷을 입고, 홑 겉옷을 걸치었다”고 하였으니,
그 문채의 드러남을 꺼려한 것이다.
그러므로 군자의 도는
어둑어둑하면서도 날로 밝아지고
소인의 도는
뚜렷하면서도 날로 사그라지는 것이다.



君子之道 淡而不厭 簡而文 溫而理

知遠之近 知風之自 知微之顯 可與入德矣

 

 

君子之道(군자지도)는
淡而不厭(담이불염)하며
簡而文(간이문)하며
溫而理(온이리)니
知遠之近(지원지근)하며
知風之自(지풍지자)하며
知微之顯(지미지현)이면
可與入德矣(가여입덕의)리라

군자의 도는 담담하되 싫어지지 않고,
간결하면서도 문채가 있으며,
온화하면서도 조리가 있다.
먼 것의 가까움으로부터 함을 알고,
바람의 불어오는 곳이 있음을 알며.
미세함의 뚜렷해짐을 알면
가히 함께 덕으로 들어갈 수 있을 것이다.



詩云潛雖伏矣 亦孔之昭 故 君子 內省不疚 無惡於志

君子之所不可及者 其唯人之所不見乎 詩云相在爾室

尙不愧于屋漏

 

 

詩云潛雖伏矣(시운잠수복의)나
亦孔之昭(역공지소)라하니
故(고)로 君子(군자)는
內省不疚(내성불구)하여
無惡於志(무악어지)하나니
君子之所不可及者(군자지소불가급자)는
其唯人之所不見乎(기유인지소불견호)인저
詩云相在爾室(시운상재이실)한대
尙不愧于屋漏(상불괴우옥루)라하니

시경에, “잠기어 비록 엎디어 있지마는
또한 매우 현저하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군자는
안으로 반성하여도 병되지 아니하여
마음에 부끄럽지 아니하니,
군자에게 미칠 수 없는 바의 것은
바로 사람들이 보지 못하는 곳이다.
시경에, “그대가 방에 있음을 봄에
또한 방구석에도 부끄럽지 않아야 한다.”고 하였다.



故 君子 不動而敬 不言而信 詩曰奏假格無言

時靡有爭 是故 君子不賞而民勸 不怒而民威於鈇鉞

詩曰不顯惟德 百辟其刑之

 

 

故(고)로 君子(군자)는
不動而敬(불동이경)하며
不言而信(불언이신)이니라
詩曰奏假格無言(시왈주가격무언)에
時靡有爭(시미유쟁)이라하니
是故(시고)로 君子(군자)는
不賞而民勸(불상이민권)하며
不怒而民威於鈇鉞(불노이민위어부월)이니라
詩曰不顯惟德(시왈비현유덕)을
百辟其刑之(백벽기형지)라하니

그러므로 군자는
움직이지 않아도 공경하며,
말하지 않아도 믿음이 있다.
시경에, “내리신 신께 나아가 말이 없으매
그때에는 다툼이 없도다.”고 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군자는
상 주지 않아도 백성들이 권면하며,
노하지 않아도 백성들은 도끼에보다도 더욱 위압당하는 것이다.
시경에, “크게 밝은 덕을,
제후들이 그대로 본받도다.”고 하였다.



是故 君子篤恭而天下平 詩云予懷明德 不大聲以色

子曰聲色之於以化民 末也 詩云德輶如毛 毛猶有倫

上天之載無聲無臭 至矣

 

 

是故(시고)로 君子(군자)는
篤恭而天下平(독공이천하평)이니라
詩云予懷明德(시운여회명덕)의
不大聲以色(불대성이색)이라하여늘
子曰聲色之於以化民(자왈성색지어이화민)에
末也(말야)라하시니라
詩云德輶如毛(시운덕유여모)라하나
毛猶有倫(모유유륜)하니
上天之載無聲無臭(상천지재무성무취)아
至矣(지의)니라

그러므로 군자는
독실하고 공경함으로써 천하를 화평케 하는 것이다.
시경에, “나는 밝은 덕을 그리나니
성과 색은 크게 여기지 않는다,”고 하였다.
공자께서도, “성과 색은 백성들을 교화시킴에 있어서는
말단이다.”고 하셨다.
시경에, “덕은 가볍기가 터럭과 같다.”고 하셨는데
터럭은 그래도 비교될 데가 있다.
“상천의 일은 소리도 없고 냄새도 없다.”고 하셨으니
지당하도다.

 

 

33장-1. 衣錦尙絅

 

詩曰: “衣錦尙絅,” 惡其文之著也. 故君子之道, 闇然而日章; 小人之道, 的然而日亡.

君子之道, 淡而不厭, 簡而文, 溫而理. 知遠之近, 知風之自, 知微之顯, 可與入德矣.

 

 

“詩經에 이르길 ‘비단옷에 홑옷을 덧입는다’ 하였으니, 그 문채가 드러나는 것을 싫어하였다.

그러므로, 군자의 道는 은은하지만 날로 드러나고, 소인의 道는 선명하지만 날로 없어지는 것이다.

군자의 道는 淡하지만 싫증나지 않고, 간략하지만 문채가 나고, 따사롭지만 조리가 명료하다.

먼 것의 가까움을 알고, 바람이 시작하는 최초의 것을 알고, 은미함의 드러남을 안다면

더불어 道에 들어갈 수 있을 것이다.”

 

前章言聖人之德, 極其盛矣. 此復自下學立心之始言之, 而下文又推之以至其極也.

 

31장과 32장에서 성인의 덕을 말해 성대함을 극에 달하도록 했다.

여기서는 다시 下學의 공부가 마음을 세우는 시작임을 말하였으니 아랫 문장은 또한 그것을 미루어 그 극치에 이르게 한 것이다.

 

詩, 國風[「衛碩人」ㆍ「鄭之丰」, 皆作“衣錦褧矣.” 褧, 絅同, 禪衣也. 尙, 加也.

古之學者爲己, 故其立心如此. 尙絅, 故闇然; 衣錦, 故有日章之實. 淡ㆍ簡ㆍ溫,

絅之襲於外也; 不厭而文且理焉, 錦之美在中也.

 

시는 국풍의 衛風 「석인」과 鄭風의 「봉」의 편이니, 모두 ‘衣錦褧矣’으로 쓰여 있다.

褧은 絅과 같으니, 얇게 걸치는 옷이다. 尙은 덧입는다는 것이다.

옛날의 학자는 자기를 위하기 때문에 마음을 세움이 이와 같다.

홑옷을 덧입었기 때문에 어두운 듯하지만 비단옷을 안에 담았으니 날로 드러나는 실체가 있는 것이다.

담박, 간결, 온화함은 홑옷을 겉에 껴입는다는 것이다.

싫어하지 않음, 문리가 갖춰짐, 이성의 예리함은 비단옷의 아름다움이 안에 있다는 것이다.

 

 

‘詩曰 衣錦尙絅 惡其文之著也’

이 『詩經』의 글은 「國風 衛碩人」에도 나오고, 「鄭風 丰」1에도 나오는데,

원래 詩經에는 ‘衣錦褧衣’로 되어있지만, 여기에서는 ‘衣錦尙絅’으로 인용한 것이다.

‘絅과 褧은 같은 것으로 禪衣이다’라고 주자가 설명하고 있다

禪은 좌선한다는 뜻으로 쓰인 게 아니고 홑옷이라는 뜻이다. 얇고 가벼운 옷을 말한다.

요즘에 여성들이 검은색 옷을 아래위로 입고 겉에다가 속이 비치는 흰 옷을 입던데 그 모습이 유사한 것 같다.

『노자』에도 이 같은 내용의 말이 나오는데,

“성인은 반드시 갈포를 입고 속에다 玉을 품는다. 聖人被褐懷玉”.

 

 

옷은 자신을 과시하고 싶은 마음으로 입는다

 

여러분들은 흔히 옷의 출발이 추위로부터 인간을 보호하기 위해서 생겨난 것이라고 생각하기 쉬운데 그게 아니다.

극지방으로 갈수록 그런 경향이 있긴 해도, 사실 인류의 발생자체가 아프리카 등지의 더운

지방에서 시작되었기 때문에, 옷의 역사를 추위와 연관시켜서 논하는 것은 잘못이다.

 

옷이 생기기 전에는 문신tattoo같은 게 나타난다. 인간이나 옷에 대한 열망을 갖는 이유가

단순히 기후에 대해서 자기 몸을 보호하려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자기 자신을 과시하고 싶어 하는 욕망이 앞선다는 설이 카알라일의 『의상철학』이라는 책에 나오는데 이게 맞는 말 같다.

물론 인류에게 옷이 생기면서 인간의 몸을 보호하는 기능을 했지만, 사실 인간의 몸은 옷을

입게 되면서부터 자신의 체온을 스스로 조절할 능력 자체가 퇴화된 셈이다.

지금도 목욕탕에 가서 보면 털이 많이 난 사람들이 있다.

인간도 과거에는 털이 많아서 빨가벗고 살아도 견딜 만한 조건을 갖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옷을 입기 시작하면서 털이 퇴화된 것이다.

 

인간의 의상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역시 신분의 문제다.

옷으로써 인간의 신분을 나타낸다는 말인데, 지금도 옷을 보면 그 사람의 위치라든가 분위기

를 파악해 낼 수가 있다.

그래서 옛날에는 왕이나 임금의 옷은 대단하게 만들었다.

곤룡포를 보면 자수가 굉장하다.

 

그런데 성인들은 비단옷을 입더라도 그 위에 허름한 갈포를 걸쳐서 그 비단옷을 가렸다.

왜 그랬느냐?

“惡其文之著也” 한복을 입은 사람에 합당한 행동을 하게 되고 행동거지를 조심하게 된다.

 

‘故君子之道 闇然而日章 小人之道 的然而日亡’ ‘闇然’이라는 것은 드러나지 않는다는 의미다.

어둡다는 게 아니라 딴 것과 구별이 안 된다는 뜻이다.

속에는 거지같은 갈포를 입고 있으면서 겉에다가 화려한 비단옷을 걸치고 다니는 자들이 소인

들이란 말이다.

‘的然’은 확 드러난다는 말이다.

“日亡” 내면은 썩어 들어가는 것이다.

 

옛날 사람들의 군자지도를 묘사한 33장의 이 말은 상당히 중요한 것 같다.

“闇然而日章”

 

‘君子之道 淡而不厭 簡而文 溫而理(군자의 道는 담박하여 싫증나지 않고, 간략하면서도 문채가 나고, 온화하지만 조리가 분명하다.)’

 

簡은 아주 소략하고 거칠고 간략한 것이고, 文은 문채가 나다, 광채가 나다의 뜻이다.

溫은 온화롭고 따사롭다는 말인데, 그러면서도 理하다는 것은 명석하다, 조리가 명료하다는 것이다.

‘淡而不厭 溫而理’는 것이 바로 유교문명의 심미적 감각이다.

 

‘知遠之近 知風之自 知微之顯 可與入德矣’

문자 그대로 해석을 하면, “먼 것의 가까움을 알고, 바람이 시작하는 최초의 것을 알고,

은미함의 드러남을 안다면 더불어 德에 들어갈 수 있는 것이다.”

 

‘遠之近’이라는 것을 보면, 앞의 25장에 나왔던 ‘始終’과 같은 맥락임을 알 수 있다

‘遠近’은 따로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로 연결되어 있는 관계일 뿐이니,

‘멈’은 곧 ‘가까움’이다.

군자의 덕은 역시 이런 관계의 망에 대한 통합적 통찰을 필수적으로 요청하고 있다.

25장에서도 ‘誠者, 物之終始, 不誠無物. 是故君子, 誠之爲貴.’이라고 하지 않았나?

自라는 것은 ‘∼부터’라는 뜻으로서, ‘風之自’이라는 것은 ‘바람이 시작되는 근원’를 말하는 거다.

 

또한, ‘微之顯’이라는 건 어디서 나왔나?

바로 1장에서 군자의 愼獨을 말할 때, “莫顯乎微”에서 나온 거다 .

이렇게 제일 마지막장과 1장의 맥락이 이어지는 거다.

그래서 주자 주에도

“遠之近 風之自 微之顯 而又知此三者 則知所謹而可入德矣

(먼 것이 가까운 데에서 시작하고 바람이 이는 것이 그 근원이 있으며, 은미한 것이야말로

오히려 더 드러남을 알면, 즉 이 삼자를 알면 가히 더불어 덕에 들어갈 수 있다)”

 

그러면 이 앞에서 세 개의 세트로 연결된 ‘淡·簡·溫과 不厭·文·理’라는 것은 뭐가 되겠나?.

주자 주대로 말하면, “淡簡溫 絅之襲於外也 不厭而文且理焉 錦之美在中也(淡.簡.溫은

갈포<덧옷:絅>를 밖에 껴입는 것이요,

不厭.文.理는 비단의 아름다움이 속에 있는 것이다)”라고 했다.

계속해서 주자의 주를 읽겠습니다.

 

小人反是, 則暴於外而無實以繼之, 是以的然而日亡也.

소인은 이와 반대이니, 밖으로 확 드러나지만 실제로써는 계속하지 못한다.

이 때문에 선명하되 날로 없어지는 것이다. ‘

 

遠之近, 見於彼者由於此也, 風之自, 著乎外者本乎內也. 微之顯, 有諸內者形諸外也.

遠之近’은 멀리에 나타남이 여기에 말미암은 것이요,

‘風之自’는 밖에 드러남이 안에 근본하는 것이요,

‘微之顯’은 안에 간직한 것이 밖에 드러나는 것이다.

 

 

有爲己之心, 而又知此三者, 則知所謹而可入德矣. 故下文引詩言謹獨之事.

자신을 위한 학문을 닦으려는 마음이 있고 또 이 세 가지를 알면, 삼갈 바를 알아서

덕에 들어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아랫글에 詩經을 인용하여 謹獨(愼獨)의 일을 말씀하셨다.

 

여기서 “風之自 著乎外者本乎內也”라고 했는데, 이 바람(風)이라는 것이 해석이 어렵다.

여기 바람은 ‘덕성이 백성(일반대중)에게 미치는 영향’ 같은 그런 개념으로 해석해야 되지 않을까.

『孟子』의 「萬章下」1에 나오는 ‘伯夷之風’의 ‘風’개념으로 봐야 옳다는 주석들도 있다.

 

 

33장-2. 潛雖伏矣

 

詩云: “潛雖伏矣, 亦孔之昭!” 故君子內省不疚, 無惡於志.

君子之所不可及者, 其唯人之所不見乎.

 

 

詩經에 이르기를 ‘잠긴 것이 비록 엎드려 있으나 또한 심히 밝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군자는 안으로 살펴보아 하자가 없어서 마음에 미움이 없는 것이니,

군자의 미칠 수 없는 점은 사람들이 보지 않는 바에 있는 것이다.

 

詩, 小雅「正月」之篇. 承上文言莫見乎隱ㆍ莫顯乎微也. 疚,

病也. 無惡於志, 猶言無愧於心, 此君子謹獨之事也.

 

시는 소아 「정월」의 편이다. 윗 장을 이어 莫見乎隱ㆍ莫顯乎微를 말했다.

疚는 병폐라는 것이다. 뜻에 미워함이 없는 것은 마음에 부끄러움이 없다는 말과 같으니,

이것은 군자의 ‘愼獨’의 일이다.

 

 

‘詩云 潛雖伏矣나 亦孔之昭’ ‘潛’이란 것은 ‘숨어있다’란 뜻이고,

‘孔’이라는 것은 ‘아주 심하게’란 뜻으로서 부사적으로 쓰인 것이며,

‘昭’라는 것은 ‘밝다’.

이것은 원래 『詩經』 「小雅 正月」篇 나온 것인데, 원래 아주 맑은 연못에 물고기가

저 바닥에 쫙 하니 잠복해 있는(숨어있는) 모습을 나타내고 있다.

그러나 자기는 숨어 있다고 생각하겠지만 위에서 볼 적에는 그 바닥까지 명료하게 보이는

그런 장면을 나타내고 있는 것.

은폐된 잘못이 드러난다는 식으로 부정적인 의미로 쓴 것이 아니라,

中庸 1장의 의미(莫顯乎微)를 詩經과 연결해서 더욱 풍부히 하고 있다.

 

‘故君子內省不疚 無惡於志’ 여기서 志라는 것은 마음.

 

‘君子之所不可及者는 其唯人之所不見乎’ 여기서

‘군자에게 미칠 수 없는 바(君子之所不可及者)’라는 것은

‘우리가 군자에게 따라갈 수 없는 점’이라는 그런 의미.

“唯人之所不見乎” 이것이 바로 中庸 1장의 愼獨을 말한 것으로 유교적 덕성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다.

 

‘天命之謂性, 率性之謂道, 修道之謂敎.’로 시작해서

‘君子, 戒愼乎其所不睹, 恐懼乎其所不聞.’이라고 했다.

즉, 中庸 전체의 구성은 ‘天命’으로 시작해서, 중간에 ‘作禮樂’, ‘九經’, ‘王天下’ 등

세상만사를 얘기하다가, 제일 마지막 클라이막스에서 다시 인간의 가장 심오한

‘내면의 세계(愼獨)’로 돌아가는 것이다.

中庸이라는 이 거대한 파노라마가 33장에서 『詩經』의 싯구들로 마무리되고 있는 것에는 깊은 의미가 있다.

오로지 『詩經』의 언어들만 나열되고 있지, 딴 말은 안 하고 이 전체의 흐름을 꿰뚫은 사람이라면 이 의미를 알 수가 있다.

天命으로 시작되는 거대한 中庸의 세계가 지향하는 것은 결국 ‘詩’라는 하나의 예술적 세계로

통하고 있다.

 

詩云: “相在爾室, 尙不愧于屋漏.” 故君子不動而敬, 不言而信.

 

詩經에 이르기를 ‘네가 홀로 방안에 있는 것을 보니, 그 어두운 곳에 있으면서도 부끄럽지 않게 하는구나!’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군자는 動하지 않아도 공경하며, 말하지 않아도 믿게 한다.

 

詩, 大雅「抑」之篇. 相, 視也. 屋漏, 室西北隅也.

承上文又言君子之戒謹恐懼, 無時不然.

不待言動而後敬信, 則其爲己之功益加密矣.

故下文引詩幷言其效.

 

시는 대아 「억」의 편이다. 相은 본다는 뜻이다. 屋漏는 방의 서북 모퉁이다.

윗 문장을 이어 또한 군자의 戒謹恐懼와 無時不然을 말했다.

말하고 행동함을 기다리지 않고 공경하고 믿게 하려면 爲己의 공이 더욱 더 치밀해져야 한다.

그러므로 아래 문장은 시를 인용하여 아울러 공효를 말했다.

 

‘詩云 相在爾室’ 이 구절은 『詩經』 「大雅 抑篇」에서 따온 거다.

‘爾’는 ‘너’를 말하므로, ‘爾在室’은 ‘네가 室에 있다’라는 말이다.

지금의 문법으로 보면, 爾와 在가 서로 바뀌어야 하지만, 詩經의 언어들은 일반적으로 쓰이는

용법과는 좀 다르다.

‘相’은 ‘본다’니까, 구절 전체를 해석하면, “詩經에 말하기를 네가 홀로 방에 있음을 본다”란 얘기다.

 

“尙不愧于屋漏” 여기 ‘尙’이라는 걸 일본 사람들은 願ねがわくば, 즉 ‘원컨대’라는 식으로

번역했다.

주자 주를 보면, ‘屋漏는 室의 西北隅’라고 했다.

이것은 보통 방안에서 서북향이 어두운데, 그 중에서도 귀퉁이니까 제일 어두운 데를 말하는 거다.

‘不愧’는 부끄러움이 없다. “가장 어두운 곳에서도 부끄러움이 없다.”

이 中庸의 저자는 1장의 ‘戒愼乎其所不睹’라는 이미지를 이 시에서 끌어왔다.

 

‘故君子 不動而敬 不言而信’ 앞에서 부끄럽지 않다는 주체는 군자인데,

여기서 ‘不動而敬’이라 할 때, 敬의 주체는 백성으로 바뀌겠다.

“군자가 動하지 않아도 백성이 그를 공경하며 그가 말하지 않아도 백성이 그를 믿는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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