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성욱의 과학 오디세이

[홍성욱의 과학 오디세이] [8] 제자를 알아본 스승

bindol 2022. 7. 26. 04:03

[홍성욱의 과학 오디세이] [8] 제자를 알아본 스승

입력 2022.07.12 03:00
 
 

허준이 교수에게는 1970년 필즈상 수상자인 일본의 히로나카 헤이스케(廣中平祐) 교수와 만난 일이 결정적이었다. 학부 수업에 흥미를 느끼지 못했던 허준이는 서울대에서 초청한 히로나카의 강연을 들으면서 그와 친해졌고, 대화와 토론을 진행하면서 수학의 세계에 조금씩 빠져들었다. 그의 조언을 따라 수학과 대학원에 입학했고, 그의 추천에 힘입어 미국 유학을 했다. 지금 최고 명문 대학교인 프린스턴 대학에서 교수를 하고 필즈상을 받은 그가, 서울대 학부 성적이 나빠서, 지원했던 대학에서 대부분 떨어졌다.

우리는 창의성이 천재가 가진 역량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허준이는 수학 천재의 능력을 갖췄지만, 이런 능력이 겉으로 드러나지 않고 숨어있었다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히로나카는 이를 발견한 사람이다. 그런데 이렇게 생각하는 대신에, 창의성을 관계적으로 생각할 수도 있다. 사람 능력은 정해진 것이 아니라, 관계 때문에 결정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아인슈타인의 천재성은 그가 맺은 (진정으로 천재적인) 관계의 결과라는 얘기다.

어떤 스승은 수업을 착실하게 듣고 열심히 시험 공부를 해서 A+를 받는 제자를 좋아한다. 그렇지만 다른 스승은 창의적 지식을 만드는 데 얼마나 호기심과 열정이 있는가를 더 중요하게 평가한다. 스스로 패러다임의 변환을 만들어 낸 스승이 이렇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기존 지식을 잘 습득하고 암기하는 것과 새롭고 창의적인 지식을 만드는 것 사이에는 간격이 있는데, 전자를 잘하는 사람이 꼭 후자를 잘하리라는 보장은 없기 때문이다.

 
 

교토대 학부생 시절, 히로나카 교수는 세계적 대수학자인 오스카 자리스키 하버드대 교수의 연속 특강을 들을 기회가 있었다. 서울대가 히로나카를 초청했듯이, 당시 교토대에서 자리스키를 초청했기 때문이다. 히로나카는 자리스키의 눈에 들었고, 그의 초청을 받아 하버드로 간 뒤에 늦깎이로 박사학위를 받으면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히로나카의 창의성 역시 자리스키라는 스승과 맺어진 관계를 계기로 성장한 것이었다.

위대한 업적은 스승과 제자의 마술 같은 관계 속에서 만들어진다. 평범한 진리지만, 미래에 제2의 필즈상이나 노벨 과학상을 고민한다면 새겨봐야 할 얘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