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경희 칼럼] 克日의 반도체, 用美의 반도체
걸출한 기업인이 성공시킨 한국과 대만의 반도체 신화
이젠 ‘산업의 쌀’ 넘어 경제·안보 핵심 전략 자산
입체적·장기적 안목 갖고 정부가 더 주도적 역할 해야
반도체 종주국 미국이 한국, 대만, 일본을 묶는 반도체 동맹 ‘칩4′를 추진하고 있다. 한국과 대만은 30여 년 전 출발해 각각 세계 수위의 반도체 제조국에 올랐다. 돌이켜보면 걸출한 기업인들의 영웅적 서사였다.
중국 저장성 태생의 열여덟 청년 장중머우(張忠謀)가 미국 유학길에 오른 건 1949년이었다. 그는 태어나고 자란 중국에서의 18년을 “전쟁과 가난, 불공정으로 가득했다”고 기억했다. 중·일전쟁, 2차 세계대전, 국공내전으로 이어진 격변의 현대사였다. 중국을 떠나 36년간 미국 땅에서 미국 이름 모리스 창으로 살았다. MIT에서 기계공학을 전공하고 작은 반도체 회사를 거쳐 텍사스인스트루먼트(TI)에서 승승장구했다. 똑똑한 중국 청년에게 회사는 스탠퍼드대 박사 학위를 딸 기회도 부여했다. 50대 중반이던 1985년, 대만 정부가 그를 국책연구소장으로 모셔가 반도체 산업 육성을 맡겼다. 당시 대만의 기술력으로는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모리스 창은 미국의 뛰어난 반도체 연구원들이 생산 공장을 짓는 비용을 마련하지 못해 창업은 엄두도 못 내고 회사원으로 눌러 앉는 현실에 주목했다. 반도체 연구개발 능력에서 미국을 따라잡기 요원하니, 반도체 제조만 하는 회사를 차리기로 한 것이다. 설계와 생산을 같이 하는 반도체 종합 회사가 당연하던 시절이었다. 미국과 일본 유수의 반도체 회사들에 투자를 제의했지만 그런 게 될 리가 있느냐며 거절당했다. 초기 자본금 절반은 대만 정부 개발 기금이 대고 네덜란드 필립스가 4분의 1 약간 넘게 지분 참여한 공기업으로 출발했다. 남들은 은퇴를 생각할 나이인 56세에 TSMC를 창업해 전인미답의 시장을 개척하는 선구자가 됐다. 오늘날 팹리스(설계 전담 회사)와 파운드리(위탁 제조 회사)가 분업 구조를 이루는 시스템 반도체 분야에서 활발하게 창업이 이뤄지는 것은 TSMC의 공이라고 해도 크게 틀린 말이 아니다. 퀄컴, 엔비디아 같은 미국 굴지의 팹리스들이 TSMC에 의지한다. 미국 입장에서는 대만 TSMC의 안위가 ‘내 일’이 됐다. 중국의 위협에 맞선 대만 제1의 강군(强軍)이 TSMC라는 말이 괜히 나온 게 아니다.
한국은 대만보다 약간 먼저 출발했다. 삼성 이병철 회장이 1983년 2월 8일 첨단 기술인 초고밀도집적회로에 대규모 투자를 하겠다고 그 유명한 ‘도쿄 선언’을 했다. 당시 삼성은 가전제품용 고밀도집적회로를 겨우 만들던 실력이었다. 반도체가 산업을 좌우하는 시대가 온다는 흐름을 미리 읽고 모험을 택한 것이다. 이병철 회장은 반도체 산업이 우뚝 서는 걸 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아버지보다 먼저 반도체의 중요성에 눈 떴고 확신과 집념을 가졌던 아들 이건희 회장이 반도체 성공 신화를 이뤘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고수끼리는 통하는 법이다. 1989년 이건희 회장이 대만에서 모리스 창을 만나 영입 제안을 했던 사실이 나중에 알려졌다. 모리스 창 회장은 “뛰어난 경영자는 매우 드물다. 그런 인물인 이건희씨가 새 시대를 만들었다”고 평가했다.
탁월한 기업인이 일으킨 한국과 대만의 반도체는 닮은 듯 다른 길을 걸었다. 한국은 ‘극일(克日)의 반도체’였다. 삼성이라는 대기업이 사운을 걸고 당시 반도체를 주도한 일본 회사를 따라잡고 이기는 길을 택했다. 소품종 대량 생산의 메모리 반도체에 승부를 걸게 된 배경이다. 엔지니어 출신이 정부 지원과 민간 투자를 끌어모아 창업한 TSMC는 제조의 손발 역할을 하고 미국을 두뇌로 활용하는 ‘용미(用美)의 반도체’ 전략을 썼다. 다품종 소량 생산의 시스템 반도체 분야에서 유리한 구조다.
모빌리티 혁명, 인공지능 등 4차 산업혁명 시대에 대만 TSMC가 선점한 시스템 반도체의 성장세가 놀랍다. 하지만 지금 반도체는 비단 삼성과 TSMC 간에 누가 이기느냐의 경쟁 차원을 넘어섰다. 거대한 산업의 흐름이 바뀌는 시점에 첨단 기술로 글로벌 패권을 선점하려는 미국과 중국의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반도체가 경제·안보의 핵심 전략 자산으로 부상했기 때문이다.
전운이 감돌기 시작한 것은 중국이 ‘중국 제조 2025′로 ‘반도체 굴기’에 나선 2015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전임 트럼프 대통령은 화웨이와 자회사인 반도체 설계 회사 하이실리콘 제재에 앞장섰다. 멈칫하던 중국이 2차 반도체 굴기에 나섰다. 급기야 바이든 행정부는 중국 견제와 자국의 반도체 부활을 위해 ‘칩4′ 반도체 동맹을 추진한다.
반도체 셈법이 복잡해졌다. 국가 대항전으로 국면이 전환됐다. 이 기회에 판세를 뒤엎으려는 일본이 대만과 손잡고, ‘시장 원리’에 산업을 맡겨두던 미국 정부가 법까지 통과시키며 직접 뛴다. 윤석열 정부 들어 반도체 육성을 적극 추진하는 것은 다행스럽지만 국제 정세를 더 크게, 더 멀리 보면서 더 빨리 움직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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