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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주가 일으켜 준 덴마크의 과학 전통

bindol 2022. 8. 1. 06:08

맥주가 일으켜 준 덴마크의 과학 전통

중앙일보

입력 2022.08.01 00:36

장하석 케임브리지대 석좌교수 과학철학

 

세계 각국에는 즐겨 마시는 고유의 맥주가 있다. 특히 유럽에서는 아무리 작은 나라라도 특유한 맥주의 전통을 자랑한다. 그중 세계적으로 유명해진 품목도 있고, 그 한 예가 요즘 우리나라에도 수입되고 있는 덴마크의 칼스버그(Carlsberg)이다. 그런데 이 칼스버그는 단순한 맥주 회사가 아니다. 창업자 야콥슨(Jacob Jacobsen)이 1876년에 설립한 칼스버그 재단은 자연과학을 중심으로 모든 학문의 연구를 지원하는 덴마크에서 가장 중요한 민영재단으로 꼽힌다. 칼스버그에서 지원해 온 굵직한 연구 프로젝트들이 수없이 많다. 그렇게 재정이 풍부한 것은 매년 칼스버그 회사에서 내는 이익의 일정 비율이 재단으로 넘어가도록 규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역사상 덴마크가 낳은 가장 중요한 과학자라 할 수 있는 물리학자 닐스 보어(Niels Bohr)는 다년간 철저히 칼스버그 재단의 뒷받침을 받았다. 양자역학을 정립하는데 결정적 공헌을 한 보어는 덴마크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후 칼스버그 재단에서 받은 연구비를 가지고 2년간 영국 케임브리지와 맨체스터 대학에서 연구할 수 있었다. 그 연구 내용은 1913년에 발표되어 물리학의 전통을 뿌리째 뒤흔들었던 양자역학적 원자 구조 모델이었다. 영국에서 돌아와 코펜하겐 대학 교수로 취임한 보어는 그 후 매년 칼스버그 재단에서 크고 작은 연구비 지원을 받았다.

 

학문을 지원하는 칼스버그 재단
칼스버그 연구소서 pH개념 탄생
양자 역학의 기원에도 큰 기여
우리도 사회기여 활동 늘었으면

 

또한 여러 나라에서 촉망되는 젊은 학자들이 코펜하겐에 와서 보어의 지도 하에 연구할 수 있도록 칼스버그 재단은 지원했다. 그리하여 보어가 초대 소장으로 있었던 코펜하겐 대학의 이론 물리학 연구소는 세계적으로 명성을 떨치는 양자역학의 메카가 되었다. 그렇게 이루어진 공동 연구의 결과로 양자역학의 ‘코펜하겐 해석’도 탄생하게 되었다. 지금은 닐스 보어 연구소로 명명된 이 연구소가 더 커지고 실험 시설도 제대로 갖출 수 있도록 칼스버그 재단에서는 계속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야콥슨은 그렇게 재단을 설립하여 다른 과학자들의 연구 활동에 재정적 뒷받침을 했을 뿐 아니라 맥주를 과학적으로 생산하기 위한 연구를 하는 칼스버그 연구소도 동시에 설립하였다. 19세기 당시의 양조업은 전수받은 전통 기술로 잘 하다가도 어떤 예기치 못한 문제가 생기면 그것을 해결하지 못하고 맥주가 망쳐져서 버리는 일이 허다했다. 그러한 한계를 극복하고자 야콥슨은 과학적 맥주 연구소를 세운 것이다. 그 효과는 1880년대에 크게 나타났다. 그 당시 아무도 이해할 수 없게 칼스버그 맥주의 맛이 이상해 지기 시작했다. 그 상황에 투입된 칼스버그 연구소의 헨슨(Emil Hansen)은 맥주를 발효시키는 이스트에 여러 종류가 있고, 그중 특별한 한 종류의 이스트만이 맛있는 맥주를 만들어 준다는 것을 알아냈다. 헨슨의 공로로 그 특종 이스트를 순수하게 배양하고 다른 종류의 이스트가 들어와서 오염되지 않도록 하는 공정을 개발한 칼스버그 회사에서는 그 기술을 독점하지 않고 각국의 양조장에서 자유로이 사용할 수 있도록 무료로 배포하였다.

또 한가지 중요한 과업은 맥주의 산도를 조절하는 것이었다. 그것이 잘 안되면 발효 과정에도 문제가 있고 맛도 제대로 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뭔가를 과학적으로 조절하려면 우선 정밀한 측정이 필요하다. 20세기초 까지만 해도 물질이 얼마나 강한 산성을 띠고 있는지를 간편하게 수치로 표현하는 방법이 없었다. 칼스버그 연구소의 화학부 부장으로 1901년에 취임한 사른슨(Søren Sørensen)은 그 상황을 개선하기 위하여 “수소이온 농도 지수”라는 개념을 만들어 내었다. 그렇게 이야기하면 상당히 생소하겠지만, 그것은 바로 중고등학교 화학 시간에 다들 배우는 pH(피에이치, 또는 독일어 발음으로 페하)이다. 중성이면 pH 7도이고, 산성일수록 그 숫자가 낮아진다. 사른슨은 원액의 pH가 5.5도일 때 칼스버그 맥주가 가장 잘 빚어진다는 것을 밝혀냈다. 그래서 칼스버그 회사의 맥주 생산공정이 개선된 것은 물론이고 그보다 훨씬 더 일반적인 중요성을 지닌 기초 화학 개념을 만들어 내게 된 것이다. 그 후에 미국의 베크만(Arnold Beckman)은 오렌지 쥬스로 유명한 썬키스트(Sunkist)회사에서 의뢰를 받아 pH를 간편하게 측정할 수 있는 측정기를 발명하였다. 화학과 생물학에 관련된 모든 실험실에서는 pH측정이 거의 필수적으로 되어있다.

우리나라에서도 몇몇 대기업이나 부호들이 학문과 사회에 기여하는 사업들을 하고 있다. 참 바람직한 일이다. 그런데 칼스버그 연구소와 재단의 역사를 잘 뜯어 보면 아직도 부러운 것이 많다. 소박한 일상생활의 일부인 맥주를 만드는 것부터 그 옛날부터 오랫동안 체계적인 과학적 연구에 기반했다는 점. 거기서 나온 과학적 지식과 기술적 노하우(know how)를 다른 곳에서도 쓸 수 있도록 나누어 주었다는 점. 재단에서는 자회사의 업종에 직접 관련된 분야를 훌쩍 넘어서 모든 학문분야가 번성할 수 있도록 돕고 있다는 점. 또 그러한 좋은 일을 하는 재단과 연구소가 이미 150년 가까이 창업자의 정신 그대로 유지되어 왔고 아직도 계속 커가고 있다는 점이다.

 

장하석 케임브리지대 석좌교수·과학철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