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 속 정치이야기

[고전 속 정치이야기] 사마상여(司馬相如)

bindol 2022. 9. 27. 09:17

[고전 속 정치이야기] 사마상여(司馬相如)

천지일보

승인 2022-09-15 19:23

 

서상욱 역사 칼럼니스트

사천성 성도출신 사마상여는 거부의 아들로 문장과 검술을 함께 익혔다. 전국시대 조(趙)의 인상여(藺相如)를 유난히 좋아해 이름을 상여라고 붙였다. 재물로 관직을 샀지만, 실질을 숭상하던 경제는 화려한 문학을 좋아하지 않았다. 마침 양효왕 유무(劉武)가 내조했을 때 추양(鄒陽), 매승(枚乘), 장기(庄忌) 등 유세객들도 따라왔다. 사마상여는 병을 핑계로 관직에서 물러나 양나라로 따라갔다가 중국문학사에 빛나는 자허지부(子虛之賦)를 지었다. 사마상여는 말은 어눌했지만 글을 잘 지었다. 양효왕이 열병으로 죽자 고향으로 돌아와 백수로 지냈다. 임공령(臨邛令) 왕길(王吉)은 사마상여와 친하고 싶었다. 임공의 부자 탁왕손(卓王孫)이 왕길과 놀다가 사마상여도 부르자고 제안했다. 사마상여가 오자 좌중은 모두 그의 풍채를 보고 감탄했다. 흥이 높아지자 왕길이 사마상여에게 거문고를 주며 연주해달라고 요청했다.

탁왕손에게는 과부가 돼 집으로 돌아온 탁문군(卓文君)이라는 딸이 있었다. 대단한 미모를 지닌 그녀를 본 사마상여는 짐짓 사양하는 척하다가 자신의 감정을 실어 거문고를 연주했다. 탁문군은 음율을 매우 좋아했다. 자리가 파하자 임공으로 돌아가는 사마상여의 멋진 모습을 본 탁문군은 마음이 흔들렸다. 이후 사마상여는 자주 탁왕손의 집을 찾아가 술을 마시며 거문고를 연주했다. 탁문군은 창문으로 그를 엿보면서 안타까워했다. 결국 탁문군은 밤중에 사마상여를 찾아갔다. 두 사람은 성도로 도망쳤다. 화가 난 탁왕손은 한 푼도 도와주지 않았다. 가난에 지친 탁문군은 남편을 설득해 임공으로 돌아와 술집을 열었다. 결국 탁왕손은 많은 재물을 나눠줬다. 두 사람은 성도로 돌아가 부유하게 살았다. 훗날 자허지부를 본 한무제가 사마상여를 불렀다. 사마상여는 한무제에게 유렵지부(遊獵之賦)를 지어 바쳤다. 사마천은 사기 ‘사마상여열전’에 그 전문을 실었다.

몇 년 후 외교적 수완을 발휘해 서남의 이민족을 흡수했다. 사마상여가 파촉에 도착하자 태수 이하 현령들이 모두 나와 영접했다. 탁왕손도 사위를 잘 얻었다고 만족했다. 주변 부족들이 투항하자 변경의 관문을 개방했다. 한의 영역은 서남쪽으로 멀리 확장됐다. 장안으로 돌아온 사마상여는 사신으로 갔을 때 뇌물을 받았다는 탄핵을 받아 관직에서 물러났다. 그러나 그의 재능을 아꼈던 무제는 1년 후에 복직시켰다. 이 무렵 사마상여는 당뇨병을 앓고 있었다. 당뇨병은 술과 기름진 음식을 지나치게 먹거나 강한 정신적 자극 또는 신정(腎精)의 과도한 소모로 장부에 열이 모여서 발생한다. 병은 뛰어난 능력과 자유분방한 기질을 지닌 사마상여를 지치게 만들었다. 장인으로부터 많은 재산을 얻은 사마상여는 이미 정치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러나 그의 재능을 사랑한 무제는 자주 불러서 사냥을 즐겼다. 사마상여는 대인부(大人賦)를 비롯한 몇 편의 글을 지어 무제의 지나친 사치와 신선놀음을 풍간했다. 무제는 그의 글을 사랑했지만 자신의 취향을 바꾸려고 하지 않았다.

사마상여의 글을 아끼던 무제는 그의 병이 위중하다는 말을 듣고 모든 작품을 가져오라고 명했다. 사신이 도착했을 때 그는 이미 죽고 없었다. 탁문군은 남편이 지은 글은 이미 다른 사람들이 다 가져가고 황제에게 전하라는 편지만 남았다고 말했다. 편지의 내용은 대부분 봉선(封禪)에 대한 것이었다. 사마천은 그에게 심취해 별도의 열전을 지었다. 동시대의 탁월한 사상가 동중서(董仲舒)에 대한 열전을 별도로 편성하지 않은 것과 대비하면 사마천의 그에 대한 애정을 엿볼 수 있다. 그러나 동시대의 양웅(揚雄)은 사마상여의 글을 심하게 비판했다.

“사미화려(奢靡華麗)하여 백 가지를 칭찬하다가 마지막에 한 가지를 풍자했다. 마치 음란한 정(鄭)과 위(衛)의 음악을 질탕하게 연주하다가 끝난 후에 아악(雅樂)을 연주하는 것과 같다. 이는 이미 본뜻을 잃은 것과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