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규태코너] 사계(死計)
명종(明宗) 때 홍계관(洪繼寬)이라는 소문난 점쟁이가 있었다. 그는 죽는 해 죽는 달까지도 들어맞혔다 해서 상류사회의 가마가 그 문전에서 줄지어 서서 기다렸다. 상진(尙震) 정승도 이 점쟁이로부터 죽는 연월을 점쳐두고 그 3년 전부터 편안하게 죽을 수 있게끔 사계(死計)를 세워 챙겨나갔다.
당시 전통 지식층에는 어떻게 해야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보다 편안한 마음으로 맞을 수 있느냐라는 사계(死計)문화가 번져 있었는데 송나라 학자 주신중(朱新仲)의 인생 오계론(五計論) 곧 생계(生計), 신계(身計), 가계(家計), 노계(老計), 사계(死計)의 영향을 받아 ‘오멸(五滅)’이라는 노후 철학이 그것이다.
그 하나가 삶에 미련을 잡아두는 재물을 극소화해야 죽음이 편안해진다는 멸재(滅財)요, 그 둘이 멸원(滅怨)으로 살아 오는 동안 남에게 산 크고 작은 원한을 애써 풀어버릴수록 죽음이 편안해지며 그 셋이 멸채(滅債)로 남에게 진 물질적·정신적 부채를 청산하는 일이다. 중종 때 선비 김정국은 언젠가 화가 나 발길질했던 강아지에게까지 뼈다귀를 물려 멸채를 하고 있다.
그 넷이 멸정(滅情)으로 정든 사람 정든 물건으로부터 정을 뗄수록 죽음이 편해지며, 그 다섯이 죽으면 끝장이 아니라 죽어서도 산다는 멸망(滅亡)이다. 죽어서도 산 사람과 더불어 사는 제례(祭禮)가 발달한 옛 한국인만큼 안락한 마음으로 죽을 수 있는 노인은 세상에 없다고 말한 것은 독일 노인운동의 대모 운루 할머니다.
상진 대감은 이렇게 오멸철학을 실천하며 죽음을 겸허하게 기다렸는데 죽는다는 연월이 지나도 죽을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이에 홍계관을 불러 맞지 않은 점괘를 두고 따지자 "죽을 운명을 좌우하는 것은 오로지 남에게 알리지 않고 베푼 음덕(陰德)뿐입니다"라며 생각나는 음덕 베푼 일이라도 없으십니까라고 물었다.
임금님의 수라간에서 금밥그릇을 훔쳤다가 들킨 별감(別監)으로 하여금 장물을 현장에 갖다 놓게 하고 은밀히 사형을 면케 해준 음덕으로 15년간 더 살았던 것이다. 음덕 덕분이 아니라 오멸(五滅)에 의한 정신적 안정 때문에 연명했을 것이다. 죽음학회가 발족, 마음 편하게 죽는 학문을 체계화한다기에 전통 사계문화를 들추어 보았다.
(이규태 kyoutaelee@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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