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규태 코너

[이규태코너] 선·후배 문화

bindol 2022. 10. 8. 10:51

[이규태코너] 선·후배 문화

조선일보
입력 2005.03.29 18:22
 
 
 
 

국세청장 인사에서 청장과 행시 동기생 6명이 동반 퇴진하고 차장인사로 행시 선배 20여명의 진퇴가 거론되고 있다는 보도가 있었다. 비단 국세청뿐 아니라 검찰청 등 법조인사를 비롯, 공무원 인사에서 후배의 승진에는 동기나 선배가 퇴임하는 관행이 지배해 왔고 후배에게 길을 터준다는ㅡ본인에게는 잔인한 미덕이 돼왔다. 하지만 이는 구시대의 미덕이요, 없어졌어야 했을 관행이다. 미(美) 건국시대의 정신지도자 프랭클린은 유럽에서 신대륙에의 이민이 붐을 이루고 있을 때 이민조건을 이렇게 고시(告示)했다. "신분이나 학벌·문벌에 안주하거나 위아래를 따지는 사람은 미국에 발붙일 수 없으며 뭣인가를 할 수 있으면서 서로 평등하게 공존할 수 있는 사람만이 살 수 있는 미국이다"라고 했다. 곧 종적(縱的) 서열의식을 버리고 횡적(橫的) 평등의식으로만이 잘 살 수 있음을 강조한 것이다.

땅에 의존하는 농사를 주로 지어먹고 살아온 우리나라는 조상 대대로 한 마을에 붙박이로 살아온 정착도(定着度)가 별나게 강한 사회요 이처럼 서로를 잘 알며 살아온 정착사회가 안정을 유지하려면 위와 아래, 높고 낮은 서열이 정해져 있어야 한다. 공부 잘하는 아이들이나 예쁜 여자들끼리 친하지 않듯이, 평등해졌을 때 반발하고 불화하기에 정착도가 강한 사회일수록 서열이 발달하고 서열의식이 강해진다. 옛 조상들은 초면에 만나면 반상(班常)을 따지고 종씨면 항렬을, 항렬이 같으면 나이를, 나이가 같으면 난 달 난 날을 따져서라도 서열을 정해야 관계가 안정된다. 같은 피가 통하는 한 몸통도 배꼽 윗부위는 아랫부위보다 서열이 높고 오른손은 왼손보다 서열이 높다. 그래서 갓을 쓴다든지 뒤통수 긁는 일은 오른손 담당이요 발 씻고 배설 뒤치다꺼리는 왼손 전담이다.

정착성 생업에서 거의 이탈하고 도시가 형성되어 전근대 사회가 무너지고 있지만 해묵은 정착시대의 의식은 살아남아 있으며 그중 하나가 공직사회에서 후배가 승진하면 선배가 그만둬야 하는 서열문화다. 이민시대의 프랭클린의 고지사항이 우리 공직사회에 시사하는 바 있으며 개혁이란 바로 그런 맹점에서 발상돼야 한다고 본다.

(이규태 · kyoutaelee@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