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규태 코너

[이규태 코너] <6518> 부여씨(扶餘氏)

bindol 2022. 10. 10. 08:49

당나라 서울 뤄양(洛陽) 남쪽에 있는 용문석굴 한 기둥에 조그맣게 두 개의 감실(龕室)을 파고 석상 둘을 새긴 그 아래'부여씨(扶餘氏)'라는 명문이 발견되었다는 보도가 있었다. 백제 멸망 후 의자왕, 태자 부여륭(扶餘隆)과 더불어 포로로 잡혀 갔던 왕성(王姓)의 한 백제석공이 사역하면서, 한 품고 여생을 마친 왕과 태자의 망국한을 달래고 명복을 비는 뜻에서 새겼을 것이다. 의자왕은 3천 궁녀를 거느린 방탕으로 망국을 자초한 것으로 돼있다. 실은 효심이 지극해 해동증자(海東曾子)의 별칭을 받고 30개 성을 정복한 용감한 임금이었으나 망국임금에 대한 관행인 격하와 폄하로 누명을 얻은 것이 학계에서 입증돼왔다.

나라가 망하자 의자왕은 묶인 몸이 되어 1만3천명의 포로와 더불어 뤄양으로 연행되었다. 당시 당나라는 궁녀출신인 무측천(武則天)이 고종의 사랑을 배경으로 황후를 촌단 술독에 넣어 죽이고 궁문(宮門) 이름을 자기 이름인 측천문(則天門)으로 바꿨을 무렵이었다. 그 측천문 아래 묶이어 투항의 예를 치르고서야 의자왕을 풀어주고 있다. '구당서'의 기록은 포로 수를 58명으로 적고 있는데 아마도 왕족과 중신수만을 적은 것이요 백제의 각종 기능을 지닌 장인들을 1만여명 연행했을 것이며 그 중 석공 하나가 용문에 망국한을 새긴 것이 1천 수백년 만에 발견된 것일 게다.

심신이 쇠진한 의자왕은 얼마 후 돌아가셨는데 뤄양의 북망산, 오왕(吳王)인 손호와 진왕(陳王)인 진숙보의 묘역에 치장, 주색망국의 두 임금 곁에 묻음으로써 의자왕을 폄하시켰으나 오랜 세월에 그 위치를 확인 못하고 있다. 부여군에서는 이 북망산 흙과 일제 때 이곳에서 발견된 부여융의 묘지석(墓誌石) 복제품으로 부여 능산리에 가묘를 만들어 해마다 제사를 지내온 와중인지라 당시의 유적 발견은 큰 수확이다. 중국고문헌에 부유(鳧臾) 성은 부여씨의 전음이라는 기록이며 전리품인 백제삼보(三寶) 가운데 자금대(紫金帶)는 현종이 아우에게, 홍속옥(紅粟玉)은 양귀비에게 주었음이 문헌에 나와 있는 등 이를 계기로 중국에 묻힌 백제를 찾아내는 데 정부와 학계가 협력했으면 한다.

(이규태 kyoutaelee@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