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현진의 돈과 세상

[차현진의 돈과 세상] [94] 말 한마디

bindol 2022. 10. 30. 16:05

[차현진의 돈과 세상] [94] 말 한마디

입력 2022.10.26 00:10
 
 
 

말 한마디가 세상을 뒤흔든다. 1997년 11월 외환 위기의 폭풍우가 몰려올 때 새로 임명된 임창열 경제부총리는 시장을 안심시키려고 했다. “지금 IMF행이 꼭 필요한 것은 아니다”라는 취지로 말했다. 하지만 역효과를 일으켰다. 정부가 아직도 사태를 파악하지 못한다는 비판과 함께 금융시장이 더 불안해졌다. 이틀 뒤인 11월 21일 한국 정부는 결국 IMF에 구제금융을 신청했다.

장관이 시장을 안심시키기는커녕 겁을 주는 경우도 있다. 제1차 세계대전 여파로 1920년부터 일본의 반동 공황(反動恐慌)이 시작되었다. 1923년에는 관동 대지진까지 터져서 엎친 데 덮친 격이 되었다. 그러자 일본 정부는 수출 대기업에 긴급 구제금융을 실시했다. 그중 상당액이 정치자금으로 흘러갔다. 대출금 회수는 지지부진하고, 금융기관 부실은 은폐되었다.

1927년 초 그 사실이 알려졌다. 경제 파탄의 위기감이 금융시장을 덮치자 여당은 급한 불을 끄기 위해서 새로운 구제금융 법안을 마련했다. 그러나 야당은 진상 파악이 먼저라면서 법안 통과를 거부했다. 의사당에서 여야 의원들이 난투극을 벌이는 가운데 가타오카 나오하루(片岡直溫) 재무장관이 연단에 올라 폭탄 선언을 했다. “업계 3위인 와타나베은행이 방금 파산했다”면서 위기 확산을 막으려면 그날 당장 법안을 통과시켜야 한다고 압박했다.

 

그 순간 와타나베은행은 아직 파산하지 않았다. 하지만 장관의 협박이 위기를 촉발해 이튿날 진짜로 파산했다. 그러자 일본 최대 기업인 스즈키 상점도 문을 닫고, 식민지의 대만은행까지 파산했다. 조선은행도 흔들렸다. 줄도산 사태에 내각은 수습을 포기하고 총사퇴했다. 가타오카 장관의 발언은 사상 최악의 실언으로 기록된다.

김진태 강원도지사가 “불의와 불공정을 뿌리뽑겠다”면서 회사채 지급 보증을 거절했다. 겁을 주려는 것도, 안심시키려는 것도 아니었지만, 금융시장이 불안해졌다. 말 한마디가 중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