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규태 코너

[이규태코너] 의족 마라톤

bindol 2022. 10. 30. 16:11

[이규태코너] 의족 마라톤

조선일보
입력 2003.10.13 17:39
 
 
 
 

80년대 초 미국 뉴멕시코에 우주인 ET가 하이웨이에 나타났느니, 개가 티셔츠를 입고 하이웨이를 달리고 있다는 제보가 언론 방송에 답지해 보도 항공기가 뜨는 소동이 벌어졌었다.

알고 보니 두 다리 잘린 베트남 참전용사가 고고한 미대륙 횡단 마라톤을 하고 있는 중이었다. 보브 위랜드라는 이 용사는 오로지 두 팔만으로 4454㎞의 미대륙을 3년8개월6일 만에 주파해낸 것이다.

88서울올림픽이 있던 해 봄에는 로스앤젤레스 마라톤에 출전, 풀코스를 74시간8분26초 만에 주파했다. 하루 전날 심판도 없이 출발, 1마일에 2시간꼴로 달려 경쟁자 없이 3일간을 달린 끝에 역시 심판 없는 골인을 했었다.

이로써 위랜드는 80년대 미국의 3대 정신영웅으로 떴었다. 먹고 입고 사는 것이 풍족해지면서 부모는커녕 신(神)까지 버리고 무기력해진 미국 청소년들에게 위랜드의 도전정신은 신선한 충격으로 와닿았으며, 그 때문에 사고를 전환, 무기력에서 탈출한 청소년이 28%나 된다는 조사마저 있었다. 위랜드 같은 극소화된 육체능력에의 도전일수록 정신력에서 무력해진 세대에게 반동의 힘을 일깨워준다.

 

88서울장애자올림픽에서 역시 두 다리 없는 소년 케니가 스케이트보드를 타고 성화를 나르는 것을 보고 기록을 경신했다는 선수가 많았던 것도 바로 이 육체 한계에의 도전이 가져온 정신생산의 과실이다.

임진왜란 때 겁탈하러 드는 왜병을 피해 나무기둥을 필사적으로 끌어안고 있던 현풍(玄風)의 허녀(許女)는 두 팔을 잘렸는데 후에 입산, 보살이 되어 입으로 붓을 들어 법화경을 사경(寫經)하고 그 경문에 수를 놓아 부처님 앞에 포장을 치기도 했다. 그 신심이 마을로 고을로 번져나가 상사하는 대중들로 발디딜 틈이 없었다 하니 이 역시 정신생산으로 열매 맺은 육체 한계에의 도전이다.

서해교전에서 오른쪽 다리를 잃은 이희완 대위가 의족을 하고 5㎞ 마라톤 코스를 완주, 더불어 뛴 사람들을 울먹이게 하였고 연도에서 보던 사람들을 울부짖게 했으며, 그 소식을 들은 많은 국민들에게 감동을 주었다. 그 더욱 미군전차 사고로 희생당한 두 여학생을 추모하는 촛불시위에 가려 희석됐던 서해교전 희생자를 둔 억하심정을 후련하게 하는 의족 마라톤이다.

(이규태 kyoutaelee@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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