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규태 코너

[이규태코너] 말죽거리

bindol 2022. 11. 1. 16:35

[이규태코너] 말죽거리

조선일보
입력 2003.07.22 15:54
 
 
 
 

한양에서 남도로 내려갈 때 첫밤을 자고, 남도에서 한양으로 올라올 때 마지막 밤을 자는 역이 말죽거리다. 따라서 역사도 풍성한 이 옛 역원(驛院) 자리인 지하철 3호선 양재역 입구에 말 모양을 한 표석에 사적을 새긴 ‘말죽거리’ 비가 섰다. 본 지명은 양재(良才)요, 속명이 말죽거리다.

어진 재사들이 많이 나서 양재란 이름이 붙었다했는데, 고려 때 이규보(李奎報)의 문집에 보면 양재(楊梓)라 나온 것으로 미루어 양재천 물이 거름져 버드나무와 가래나무가 무성했던 데서 비롯된 이름일 것이다. 말죽거리란 친근한 지명의 내력도 세 가지의 이설이 있는데 그 모두 이곳의 역사와 연관이 있어 살펴볼 가치가 있다.

양재벌은 병자호란 때 인조가 피란가 있는 남한산성을 포위한 청나라 우익군(右翼軍)의 병참기지가 자리하고 있었다. 당시 용골대 장수의 휘하 군사동력인 말들을 모아 먹이고 보급했던 현장인지라 말에게 죽을 쑤어 먹였던 마을이라하여 말죽거리라는 이름을 얻었다는 것이다.

다른 한 설로는 인조반정의 논공행상에 불만을 품고 이괄이 난을 일으키자, 인조께서 피란길에 올라 양재에 이르렀을 때는 몹시 허기졌었다. 이때 이곳 유생 김이(金怡) 등이 팥죽을 쑤어 받침으로, 임금이 말 위에서 그 죽을 드셨다해서 말죽거리로 불렸다는 것이다.

 

양재는 팔도에서 한양에 가장 가깝기에 배웅하고 마중하는 사람으로 가장 붐비는 역원이요 따라서 호들갑스런 여인을 ‘양재역 주모’라고 하듯이 주막이 발달하고 그 많은 사람이 타고 오가는 말들 먹이는 말죽 냄새가 떠날 날이 없었을 것이다. 이곳에 말똥구리며 작은마방 등 말에 관한 지명이 남아있었던 것으로 미루어 마방 인근에 말죽 끓이는 집들이 집결돼 있어 말죽거리로 불렸을 확률이 높다.

말죽거리의 가장 뼈아픈 역사 기억은 그 역사(驛舍)에 나붙었던 괴벽서(怪壁書)사건이다.정언의라는 이가 전라도에 시집간 딸을 배웅하러 양재역에 갔다가 당시 문정왕후를 업고 자행되던 윤원형 일당의 세도를 비방한 벽서를 보고 고발하여 반대당을 모조리 쓸어 죽인 친위사화(親衛士禍)의 발발현장이기도 하다. 지방자치단체들의 관내 관광사적 개발이 한참인데 표석만 말고 양재역사를 복원, 그 속에 말죽거리의 역사들을 수렴했으면 한다.

(kyoutaelee@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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