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규태 코너

[이규태 코너] 물에 뜨는 돈

bindol 2022. 11. 15. 08:53

[이규태 코너] 물에 뜨는 돈

 

조선일보
입력 2003.01.05 20:54
 
 
 
 


미국에서 복권에 당첨된 돈 10만달러(약 1억2000만원)라는 거액을
구세군에 희사를 했는데 구세군측에서 '도박으로 번 돈은 자선에 해독을
끼친다' 하여 되돌려주었다는 보도가 있었다. 돈이란 액면의 경제적
가치만으로 유통되는 것이 아니라는 오랜 만에 듣는 싱그러운 소식이요,
돈의 질에 너무 맹목적이던 우리들의 정신 자질을 쑥쓰럽게 뒤돌아보게
하는 작은 해프닝이 아닐 수 없다. 경제적 가치를 짓누르는 정신적 돈은
우리 나라에도 전통이 유구하다. 고을마다 대금업자가 있게마련인데
복전주(福錢主) 부전주(浮錢主)로 은밀히 갈라져 있어 복돈(福錢)의
이자는 뜬돈(浮錢)의 이자보다 몇 곱절 많았다. 더욱이 요행이 많이
따르는 불안한 무역대금업인 의주(義州)의 은모자가(銀母子家)에서는
10배나 더 되었다. 복돈은 성실히 땀흘려 번 알찬 돈으로 이를 빌려
사업을 하면 반드시 흥하고 이 돈을 빌려 과거를 치르면 반드시
급제한다해서 복돈이다.

전주에서 남원으로 가는 첫 관문이 상관(上關)이다. 한말 상관에
삼난전(三難錢)이라는 소문난 복돈이 있어 문전성시를 이뤘었다. 그 복전
주인 조씨가 세 가지 어려운 고비를 넘기며 번 돈이라 하여 그런 이름을
얻었는데 일난(一難)은 사대부로서 술집을 시작했다는 어려움이요,
이난(二難)은 돈버는 동안 형한테까지 술값 밥값을 받아냈다는
어려움이며, 삼난(三難)은 번 돈을 모조리 형에게 돌리고 독서하는
선비로 되돌아 갔다는 어려움이다. 삼남(三南) 지방에서는 돈 많은
부자일지라도 이 삼난전 빌려 아이들 「천자문」이나 「동몽선습」을
사주는 것이 관례가 돼 내리기도 했다.

반면에 같은 은전(銀錢)이요, 쇠돈이지만 물에 담그면 가라앉지 않고
뜬다 하여 뜬돈(浮錢)은 공갈이나 속임수로 번 돈, 노름이나 도둑질
뇌물로 얻은 부실한 돈, 땀 흘리지 않고 생긴 돈을 일컫는다.
「고암가훈(顧庵家訓)에 「뜬 돈은 벌어서도 안되고 받아서도 안되며
들어 와도 바로 버리고 손을 씻을지어다」했다. 한양의 걸인배들이
걸식하며 부르는 「꼭지타령」에 「물에 떠도 좋고 바람에 날려도
좋으니ㅡ」하는 대목이 있는 것으로 보아 거지들에게나 적선하는 뜬
돈이었음을 알 수 있다. 정신 가치를 경제 가치의 상위 개념으로 삼았던
선비정신의 편린(片鱗)이 반짝 빛나는 복권 당첨금의 거부가 아닐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