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규태 코너

[이규태 코너] 원로 사랑방조선일보

bindol 2022. 11. 15. 08:58

[이규태 코너] 원로 사랑방

조선일보
입력 2002.12.29 17:50
 
 
 
 

70이 넘은 학계 문화계 원로들로 하여금 자유롭게 교유하고 도서관도
이용하며 문필· 문화활동을 할 수 있게 하는 경로공간이 문을 열었다는
보도가 있었다. 하루가 다르게 심화하는 노인비하 풍토에 찔끔이나마
내리는 감우(甘雨)가 아닐 수 없다. 사랑방은 한국 가옥의 내외구조에서
내실과 격리시킨 외실이지만 그 말 뿌리를 소급하면 마을마다 있었던
집회소라는 설도 있다. 기원전12세기 주(周)나라에는 마을마다
사(社)라는 공간이 있었다.한문에서 땅귀신 기(示)변이 든 한자는
예(禮)-기(祈)-축(祝)-사(祀)처럼 제사와 연관돼 있듯이 사(社)도 터주
신을 모셔 마을의 안태와 오곡의 풍요를 비는 신성한 제사공간이었다.
사람들이 모이기에 당집이 필요하고 이 당집을 사당(社堂)이라 불렀다.
지금도 사당리 사당동하는 지명이 있고, 사당에서 사(社)가 증발한
당고개-당산-당나무-당산목 등이 남아 있다.

제사는 증발하고 노인들이 모여 소일하는 집회기능만이 유지돼
내려왔으며 이 모임의 당집 곧 사당방이 사랑방의 뿌리라는 것이다.제사
음식인 복덕(福德)을 마을 사람에게 나누어 주던 장소가 복덕방인데
토지매매중개소가 돼 버렸듯이 사랑방의 뿌리도 사당일 확률이 높다.
그러고 보면 원로 사랑방은 본분을 잊었던 수백년 만의 복권이랄 수
있다.

국가 차원으로는 이미 고려 때부터 기로소(耆老所) 또는 기사(耆社)라는
원로 사랑방을 두어 후대했었다. 나이 70을 기(耆)라 하고 80을 노(老)라
하는데 문관으로 정2품 이상의 벼슬을 거친 원로이면 들게 돼 있었고
임금으로는 태조 숙종 영조 고종이 기사에 들고 있다. 전답과 노비와
어염을 내리고 삼월 삼짇날과 구월 중양에 기로연을 베푸는 데 편을 갈라
투호(投壺) 놀이를 하고 여락으로 융숭하게 잔치를 베풀었다.

시골에서도 노사랑이라 하여 회갑 지난 노인들만 모이는 사랑이
있었으며 마을에서 처음 거둔 곡식이나 과일은 물론이고 별식은 먼저
노사랑에 바쳤고 마을에서 추렴하여 돼지를 잡더라도 내장은 바로 이
노사랑의 원로 몫이었다. 독일의 세계적 노인운동가 트루데 운루
할머니가 미래의 가장 이상적 노인 복지는 한국의 전통사회처럼 되는
것이라고 말한 것이 생각난다. 그래서 원로 아닌 노인 사랑방 운동으로
저변화해 나갔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