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규태 코너

[이규태 코너] 벌거숭이 닭

bindol 2022. 11. 15. 08:59

[이규태 코너] 벌거숭이 닭

조선일보
입력 2002.12.27 19:08
 
 
 
 


연말을 맞아 뉴욕타임스는 올해의 기발한 발명품 97가지를 선정
발표했는데 그 가운데 이스라엘 히브루대학 연구진이 유전자 조작으로
개발한 털없는 닭이 끼었다. 털벗기는 따위의 번거로운 절차없이 닭을
요리할 수 있게 됐다는 것이다. 하기야 예전에도 털없는 닭이 없지
않았다. 고대 희랍의 철학자 플라톤과 디오게네스는 사사건건 대립하는
앙숙이었다. 언젠가 플라톤이 귀족들을 집에 불러 잔치를 베푸는데
불청객인 디오게네스가 나타나 흙 발로 고급 카펫을 짓밟고 다니며
「플라톤의 허식(虛飾)을 짓밟고 있다」고 하자 플라톤은 「디오게네스여
너는 허세를 부리지 않은 척하면서 얼마나 많은 허세를 부리고
있음인가」 했다.

플라톤이 「인간이란 털없는 두 다리의 짐승이다」고 정의하여 호평받고
있을 때 일이다. 디오게네스는 털을 모조리 벗긴 벌거숭이 닭을 들고
플라톤의 아카데미 교실에 들어가 「이것이 바로 플라톤의 인간이다」고
비아냥댔다. 그후 철학에서 '벌거숭이 닭' 하면 허식없는 순수한 인간
본연을 뜻하게 됐다. 동물학자 데스먼드 모리스의 대표작인 동물학적
인간상인 「벌거숭이 원숭이」도 이에서 암시받았다 한다.

벌거숭이 닭은 중국 후한(後漢) 때에도 있었다. 방탕으로 이름난
영제(靈帝)는 벌거벗고 논다는 1000평이나 되는 나유관(裸遊館)을 짓고
물을 끌어들여 화목을 심고 새와 고기를 살게 하고서 궁녀에게
이칠(二七) 곧 14세는 웃옷을, 삼륙(三六) 곧 18세는 아랫옷을 벌거벗겨
놀게 하였다. 이 나유관에 들려면 옷을 벗어야 한다 해서 나유관의 닭은
벌거숭이 닭이었다 하니 후한의 털없는 닭은 방탕의 상징이다. 중국
합비(合肥)의 한 은자(隱者)는 털없는 닭을 닭장에 길렀는데 그의 인품을
흠모하여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아무 말 없이 이 벌거숭이 닭을 내밀었다
한다. 곧 인생 번뇌는 닭벼슬, 닭털처럼 빛깔이 요란스런 허세요
허식에서 비롯된 것인지라 인간 본연으로 돌아가라는 가르침이 담긴
털없는 닭인 것이다.

이스라엘에서 개발한 21세기의 털없는 닭은 요리하기에 간편한
공리주의에서가 아닌 명리(名利)나 명품(名品)의 노예가 된 현대인에게
들어보이는 디오게네스의 털없는 닭이었으면 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