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규태 코너

[이규태코너] 철근없는 교각(橋脚)

bindol 2022. 11. 19. 15:39

[이규태코너] 철근없는 교각(橋脚)

조선일보
입력 2002.09.13 19:52
 
 
 
 


이솝우화에 밀밭에 사는 종달새 모자 이야기가 있다. 어느 날 농부가
찾아와 밀이 다 익었으니 사람을 시켜 거둬들여야겠다고 중얼댄다. 이
말을 듣고 놀란 새끼 종다리가 어미에게 달려가 빨리 집을 옮기자고
안달했다. 어미새는 웃기만 하고 옮길 생각 없이 1주일이 지났고 그
농부는 다시 와서 내일이라도 집사람을 시켜야겠다고 중얼대고 갔다.
새끼 종다리는 큰일났다고 울부짖었으나 어미는 웃으며 하던 일만
계속했다. 그렇게 한 달이 지나 농부가 다시 와서 더 놓아둘 수 없으니
나라도 베어야겠다고 하자 그때서야 어미는 이사 채비를 했다. 남에게
의뢰하는 건 믿을 수 없다는 교훈이지만 그 교훈과는 별도의 뜻을 찾아볼
수 있게 한다.

유럽의 기후는 온순하고 완만하여 이처럼 곡식이 익은 후 한 달 이상
둔다 해도 아무렇지가 않다. 하지만 한국에서는 벼를 위시하여 모든
작물이 익기 바쁘게 거둬들이지 않으면 장마가 오고 태풍이 불며 서리가
내려 폐농을 한다. 아열대 작물인 벼농사의 경우 평균 열흘 간격으로
손을 쓰지 않으면 급변하는 기후에 망가지고 만다. 그래서 우리 조상들은
그 시한 안에 빨리빨리 손을 써 끝장을 보아야 하고 1년 내내 시한에
쫓겨 허덕이길 수백 수천년 거듭하다 보니, 우리 한국사람은 종다리
어미처럼 느긋하지 못하고 매사에 성급하고 끝장을 빨리 얻으려 든다.
그러하다 보니 의당히 밟고 거쳐야 할 과정을 날리고 속이고 단축하고
하자를 두고 대강대강 하는 악습이 체질화되고 만 것이다.

유럽의 공공건물이나 교회건물은 착공해서 200~500년 걸리는 것이
관례다. 빨리 결과를 낸다는 생각이 없기에 지어가면서 쓰고 써가면서
짓기에 돈이 떨어지거나 전쟁이 나거나 하면 멎었다가 다시 짓곤 하기에
과정을 소홀히 할 수도 할 필요도 없다. 하지만 결과를 빨리 얻는다는
것과 과정을 소홀히 하는 것과는 정확하게 반비례하기에 멀쩡한 다리가
댕강 끊어지고 고층 백화점이 우르르 주저앉곤 한다. 다리가 무너지거나
떠내려가는 것이 연평균 100여개요, 지난번 태풍으로 200여개가 피해를
보았다. 그렇게 무너지거나 쓰러진 교각들에 철근이 들어있지 않다는
보도는 우리 모두를 실색케 한다. 수년 전 다리 쇠난간을 접착제인
본드로 붙여놓은 것을 TV프로가 고발한 것과 복합 미래에 거는 우리들
희망의 다리 몰골이라도 보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