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규태 코너

[이규태 코너] 長者論

bindol 2022. 11. 21. 07:24

[이규태 코너] 長者論

조선일보
입력 2002.07.31 19:27
 
 
 
 

보통 사람보다 키가 크거나 나이가 많거나 재산이 많을 때 장자라고 하지만, 덕이 많고 도량이 넓어도 장자라고 했다. 군자(君子)가 인격척도에서 도덕과 학식으로 뛰어난 우위인간이라면, 장자는 인간척도에서 좀 남다른 사람이랄 수 있다. ‘사기(史記)’열전에서 재상이 되는 조건으로 공통분모를 들라면 이 장자를 들 수 있다. 한나라 때 재상 직불의(直不疑)가 천거됐을 때 항간에‘얼굴이 반반하더니 형수하고도 밀통했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한데도 그는 변명하려 들지 않았으며 얼마 후에 그에게 형이 없다는 진실이 그 소문을 깨끗이 지웠고 오히려 장자라는 인식이 그의 출세를 가속시켰다.

중국의 장자가 직불의라면 한국의 장자는 김신국(金藎國)이다. 인조 때 호조판서였던 김신국은 중국에 조공 바칠 은(銀)을 싸는 일을 감독하고 있었다. 그는 서리 하나가 작은 은 덩어리를 옷소매에 숨기는 것을 우연히 보았다. 한참 있다가 그 서리가 측간 다녀오겠다기에 허락을 했다. 훔친 은을 어딘가에 숨겨놓고 돌아온 것이 분명했다. 내색 않고 있다가 김 판서가 창을 열며 말했다. “비가 오려나. 내지병인 산증이 도지려 하니 오늘은 그만 하고 내일로 미루자”하고는 현장을 지키는 숙직자로 측간 다녀온 서리를 지명하고 모두 돌아갔다. 은을 훔친 서리는 밤새워 고민하다가 숨겨둔 은을 갖다 채워 아무 일 없이 일을 진행시켰던 김 판서다. 이처럼 주변사람을 감싸는 중후한 도량이 있어야 재상일 수있었다.

 

인조 때 관고(官庫)의 벽을 뚫고 은을 훔친 범인의 열두 살 된 아들을 잡아다가 아버지의 범죄를 대게하고, 지아비의 변란 음모를 아내로 하여금 고변케 한 사건을 두고 임금은“은을 훔치고 모사를 하는 것은 기사지소(其事至小)하고 인륜을 무너뜨린 것은 기사지대(其事至大)하다”하고 그일에 관여했던 포도대장과 형조판서를, 대공신이요 부원군인데도 파직시켰다.

재상 중 우두머리인 국무총리가 인준에서 부결되었다. 투기 의혹은 시어머니한테 미루고, 학력 위조 의혹은 비서에게 미루고, 외환의혹은 은행에 미루고, 미 국적 취득 의혹은 공문의 공갈에 미루고, 땅투기 의혹은 복지에 미루었다.

범인(凡人)이면 그러할 수 있는 일들이다. 다만 그 의혹의 사실 여부는 기사지소(其事至小)요, 그것을 감싸주어야 할 사람들에게 미루었음은 기사지대(其事至大)로 장자답지 못했다.

( kyoutaelee@chosun.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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