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규태 코너

[이규태 코너] 三世同業

bindol 2022. 11. 21. 07:25

[이규태 코너] 三世同業

조선일보
입력 2002.07.30 18:35
 
 
 
 

함우치(咸禹治)가 전라감사로 있었을 때 돈 많은 양반집 형제가 유산을
가르는데 가마솥 크고 작은 것을 다투어 관청에 소송했다.함 감사가
노하여 형제로 하여금 크고 작은 솥을 가져오게 하여 「이 두 솥을
때려부수어 근으로 달아서 나누어 주겠다」고 판결하니 솥을 둘러쓰고들
도망쳐 나갔다. 옛날 자녀에게 우애를 가르칠 때 이
쟁부대소송(爭釜大小訟)고사와 황금대소투(黃金大小投)고사를 맞춤으로
가르치는 것이 관례였다. 고려 공민왕 때 형제가 길을 가는데 아우가
황금 두덩이를 주웠다. 그중 작은 한덩이를 형에게 주고는 마음의 고통을
견딜 수 없어 양천강을 건너면서 가졌던 금덩이를 물에 던져버렸다.
'황금이 생기면서 돈독했던 우애의 틈에 사특한 마음이 생기니 상서롭지
못한 물건인지라 던져버렸다' 하자 형도 '네 말이 옳다'하고 마저
던져버렸다. 조그마한 이해로 동기간이 원수지고 패가망신하는 솥 크기
싸움은 기하급수로 늘어가는데 황금버리기로 얻는 화목의 선택은
눈씻고도 찾아볼 수 없는 작금이다.

동기간도 아닌 사돈간에 동업 3대를 물린 LG그룹의 두 기둥 구씨(具氏)와
허씨(許氏) 가운데 한 기둥인 허준구씨가 작고했다. 많은 비화가
내포돼내린 이 희귀한 3세동업의 근본 철학은 바로 양천강의 황금
버리기라 해도 대과가 없을 것이다.

우리 상업관행에서 3세동업의 사례가 없지 않았다. 각성바지가 잘
조화되어 번창하는 것을 뜻하는 「육의전(六矣廛) 사돈」이란 말이 있다.
종로 인근에 널려있던 한양의 상전인 육의전의 전주들은 종적으로는
대물림하고 횡적으로는 전주들끼리 혼인하는 관습이 있어
친가(親家)·외가(外家)·처가(妻家) 삼가동업(三家同業) 구조로
대물림했다. 단골 위주로 물건을 팔았기로 고객 명단인 녹심록(錄心錄)
또는 화객첩(華客帖)이 자본이다. 보다 양질의 화객이 많을수록 큰
기업이 된다. 삼가(三家)에 전을 차려줄 때도 이 녹심록의 고객을
갈라주는 형태로 진행되었기로 동업을 대물림할 수 있었다. 이 녹심록은
전 복판 기둥에 모신 상업신 관우(關羽)상 아래 정중히 쌓아두고
명절에는 그 녹심록에서 갈라져나간 삼가(三家)후손들이 모여 제사를
지냈던 상업대가족의 족보이기도 했다. LG그룹의 구씨 허씨
삼가삼세(三家三世)동업에서 이 사라진 아름다운 전통을 보는 것만 같아
흐뭇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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