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 따라 오는 사람의 이정표가 된다네
遂作後人程·수작후인정
눈을 뚫고 들판 길을 걸어갈 적엔(穿雪野中去·천설야중거)/ 어지럽게 함부로 갈 일 아니네.(不須胡亂行·불수호란행)/ 오늘 내가 걸어간 이 발자국은(今朝我行跡·금조아행적)/ 뒤 따라 오는 사람의 이정표가 된다네.(遂作後人程·수작후인정)
위 시는 조선 후기 임연(臨淵) 이양연(李亮淵·1771~1853)의 시 ‘野雪’(야설·들판에 내리는 눈)로, 그의 문집인 ‘임연당집(臨淵堂集)’에 실려 있다. 참으로 무서운 내용을 담은 시다. 바쁜 일상에서 언제나 타의 모범만 되는 언행을 하는 게 결코 쉽지 않다. 시인이 들판에 내린 눈을 보고 읊은 것이지만, 그 속에 만고의 진리가 될 경구를 품었다
시인은 아마도 눈밭을 밟고 간 사람의 발자국을 보았을 것이다. 그 사람은 아무 생각 없이 이리저리 걸어 어지럽게 발자국을 남긴 모양이다. 그러면서 뒤 이어 걸어올 사람을 위해 반듯하게 걸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이 말은 세상 사람에게 일침을 가하는 것이면서, 자신에게 던지는 죽비 소리다.
시인은 세종의 다섯 째 아들인 광평대군 이여(李璵)의 후손으로, 공조참의·동지중추부사·호조참판·동지돈녕부사 겸 부총관 등을 지냈다. 그는 평생 ‘심경(心經)’과 ‘근사록(近思錄)’을 스승으로 삼았다. ‘심경’은 심성 수양에 관한 격언을 모은 책이고, ‘근사록’은 주돈이·정호·정이·장재 등 네 학자의 글에서 뽑은, 선비로서 삶의 방향을 제시한 책이다.
또한 그는 늙어서도 학문을 게을리 하지 않고, 많은 저서를 남긴 학자이기도 했다. 그러니 수양을 바탕으로 선비로서 처신을 함부로 하지 않는 문인이어서, 위 시와 같은 깊은 철학적 작품을 지을 수 있었던 것이다. 1948년 4월 19일 김구 선생이 해방된 조국의 분단을 막기 위해 38선을 넘으면서 위 시를 읊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일이 있어 엊그제 경기도 일산에 와 머물고 있다. 어제 바깥에 나가 길을 걷다가 올해 첫 눈을 맞았다. 이양연의 위 시는 필자가 외우고 있기도 해 얼른 생각이 났다. 필자도 평소 ‘자식은 아버지의 그림자’라는 말을 늘 가슴에 품은 채 살고 있다. 보잘 것 없는 범부에 지나지 않지만, 아들만 두 명인지라 언제나 언행을 조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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