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신년에 옥주로 유배 와서 윤 씨의 집에서 살았다
余以丙申, 恩于沃州, 居尹家
(여이병신, 은우옥주, 거윤가)
나는 병신년 4월에 은혜로 옥주로 유배 와서 성 밖 통정리에 있는 윤 씨 집에서 살았다. 흙벽은 거북 등처럼 갈라지고 방 안에는 흙먼지가 가득했다. 매일 밤 오직 벽 틈에서 귀뚜라미 우는 소리만 들렸다. 가을이라 하여 더 많아지는 법이 없고, 겨울을 지나서 더 줄어들지도 않았다.
余以丙申四月, 恩配于沃州, 居城外桶井里尹家. 土壁龜坼, 塵埃滿室, 每夜惟聞蟋蟀於壁間. 當秋而不加多, 經冬而不加小, …(여이병신사월, 은배우옥주, 거성외통정리윤가. 토벽귀탁, 진애만실, 매야유문실솔어벽간. 당추이불가다, 경동이불가소, …)
18세기 학자 이덕리(李德履·1725~1797) 문집인 ‘江心’(강심)에 수록된 작품인 ‘실솔부(蟋蟀賦)’ 서두에 병서(幷書)한 글 중 앞부분이다. 병신년은 1776년(영조 52)으로, 이덕리는 그해에 전라도 옥주(진도의 옛 이름)로 유배 갔다. 그가 살았던 윤 씨 집 방은 흙벽으로 갈라져 밤마다 귀뚜라미 소리가 들렸다. 그는 세 해만에 통정리 서쪽 이 씨 집으로 옮겨 살았다.
그는 어떤 사유로 귀양 간 것일까? 이덕리의 형 이덕사(李德師·1721~1776)가 정조가 즉위한 직후인 1776년 4월 1일, 뒤주에서 죽은 정조의 아버지인 사도세자 추손 상소를 올렸다가 이튿날 대역부도로 능지처참당했다. 이덕리는 그의 아우라는 이유로 연좌돼 52세에 진도로 유배 갔다. 이덕리의 세 아들도 함경도 무산, 경상도 남해, 전라도 강진으로 유배 보내졌다. 그는 52세부터 71세인 1795년까지 20년간 진도에서 귀양살이를 하다 영암으로 이배돼 2년 더 살다가 1797년 73세로 세상을 버렸다.
이덕리는 유배지에서 초의선사의 ‘동다송(東茶頌)’에 ‘동다기’란 이름으로 인용된 ‘기다(記茶)’와 국방 관련 주요 저작인 ‘상두지(桑土志)’를 지었다. ‘동다기’는 차계의 전설이 됐지만 실물이 나오지 않았다. ‘동다기’와 ‘상두지’는 다산 정약용의 저작으로 잘못 알려져 왔고, 그의 문집인 ‘여유당전서보유’에 버젓이 실리기까지 했다. 그 뒤 220년이 흘렀다. 한양대 정민 교수가 우연한 기회에 관련 자료를 얻어 10여 년간 이덕리를 추적해 이런 사실을 모두 밝혔다. 필자는 정 교수의 연구성과에 의존해 이 글을 정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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