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종묵의 한시 마중 44

[이종묵의 ‘한시 마중’]<4>책 읽는 소리

세상에 책 읽는 소리보다 아름다운 것이 있을까요? 19세기의 학자 임헌회(任憲晦·1811∼1876) 역시 그러하였습니다. 임헌회는 세상이 어수선해지자 벼슬을 마다하고 공주 산골로 들어가 조용히 살고자 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도 자식이 열심히 책을 읽으면 세사(世事)의 고민을 잊을 수 있었습니다. 한바탕 비가 뿌려지고 나니 시원한 바람이 불어옵니다. 그 덕에 졸다가 잠에서 깨어나니 절로 마음이 상쾌하겠지요. 세사의 고민이 모두 다 사라집니다. 마침 마음을 미리 알아차린 아내가 김치에 막걸리 한 사발을 내어옵니다. 그것만으로도 행복한데 귓가에 아이들의 책 읽는 소리가 낭랑하게 들려옵니다. 더 바랄 것이 없겠지요. 부귀영화를 누리려 아등바등하는 시대라, 이런 단출한 삶이 더욱 그립습니다. 양반의 대열에는 들지..

[이종묵의 ‘한시 마중’]<3>기다리는 사람

아직 단풍이 곱고 국화가 아름답지만 가을의 풍경을 보노라면 왠지 쓸쓸해집니다. 사람이 그리운 게지요. 을사사화에 연루되어 1547년 젊은 사림(士林) 노수신(盧守愼)은 전라도 진도로 유배되었습니다. 그로부터 18년이 지난 1565년 무렵 이 시를 지었습니다. 얼마나 사람이 그리웠겠습니까? 아우나 제자가 방문한다는 기별을 받은 모양입니다. 꼭두새벽부터 공연히 마음이 급합니다. 사람이 얼마나 그리웠으면 새벽부터 나루로 향했을까요. 보름이 가까운지라 달빛이 훤합니다. 형영상조(形影相弔)라는 말이 있습니다. 함께 할 것이라곤 그림자 하나뿐이라는 말이니 고단한 신세를 가리킵니다. 귀양살이라 누가 같이 갈 사람이 있겠습니까? 달빛을 받으면서 그림자 뒤세우고 그렇게 길을 나선 것이지요. 가다 보니 길가에 국화가 노랗..

[이종묵의 ‘한시 마중’]<2>지리산 산골의 가을

조선 전기 사림의 영수로 알려진 김종직(金宗直·1431∼1492)은 경상도 함양(咸陽)의 군수로 있던 1471년 가을 벗들과 지리산을 유람했습니다. 천왕봉을 오르는 도중 의탄 마을이라는 곳에 도착해 이런 시를 지었습니다. 540년도 더 지난 오늘날도 지리산 기슭에 두면 어울릴 듯한 풍경이기에 눈길을 끄는 반가운 작품입니다. 늙은 농부가 가을걷이를 한 후 볏단을 정리하여 차곡차곡 쌓아올려 놓으니 초가지붕보다 높다랗습니다. 시골에서는 아이도 그냥 놀 수 없으니, 송아지 키우는 일은 아이들 몫입니다. 아이가 무슨 딴짓을 하느라 한눈을 판 탓에 송아지가 아직 거두지 않은 밭으로 들어갔습니다. 농부는 놀라 아이에게 고함을 칩니다. 이럴 때면 아낙네들은 마루에 모여 앉아 감을 깎아 곶감을 만듭니다. 곶감은 처마에 ..

[이종묵의 ‘한시 마중’]<1>벗이 짚신을 보낸 뜻

가을이 되면 왠지 사람이 그리워집니다. 세속의 인연을 끊고 사는 산문(山門)의 승려도 깊어가는 가을빛을 보고 벗이 그리웠나 봅니다. 그래서 윤결(尹潔·1517∼1548)이라는 벗에게 불쑥 짚신을 한 켤레 보냈습니다. 윤결은 을사사화에 희생된 강직한 선비로 알려져 있지만 운치를 아는 시인이었기에, 벗이 짚신을 보낸 뜻을 이렇게 풀이했습니다. “어찌 이리 발걸음이 뜸하신가요? 듣자니 세사(世事)가 싫어 두문불출한다지요. 아마 마당에는 오가는 이 없어 이끼만 파랗게 덮였겠구려. 작년 깊어가는 가을날에 붉은 단풍잎 밟고 다닌 일 그립지 않으신가요? 올가을도 저물어가니 한번 들러 함께 단풍구경이나 하시지요.” 승려가 짚신을 보낸 뜻이 하나 더 있습니다. 조선 전기 시인 이행(李荇)이 “짚신 신고 지리산 다시 밟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