中庸
[『中庸』은 『禮記』 제31편으로 宋代의 朱子가 四書의 하나로 분류하면서 더욱 널리 알려진 글이다. 여기서의 해설은 漢代 鄭玄의 注와 唐代 陸德明의 音義와 孔穎達의 疏를 포함한 『中庸正義』와 朱子의 『中庸章句』를 서로 비교해볼 수 있도록 원전 아래에 각각의 주석을 나눠 붙이되, 音義는 필요에 따라 발췌해 붙인다. 章別 분류는 朱子의 章句本을 따랐고, 章句序는 본문 뒤에 붙인다. 아울러 해설이 부족하거나 미진한 부분이 있으면 家苑의 [講說]을 덧붙인다. 『中庸正義』원문은 武英殿十三經注疏本이고, 『中庸章句』 원문은 摛藻堂四庫全書薈要本인 影印古籍 欽定四庫全書會要에 있는 것으로 http://ctext. org/library에 실린 PDF 파일에 근거했으며. 『中庸』원전의 토와 細注는 『原本備旨中庸』(명문당판)을 참조했다.]
[공영달 疏 註] 正義曰案鄭目錄云名曰中庸者는 以其記中和之爲用也니 庸은 用也라 孔子之孫子思伋作之하여 以昭明聖祖之德하니라 此는 於別錄屬通論이라
정의에 가로대, “정씨의 목록을 살펴보건대 중용이라고 이름붙인 것은 그 중화가 씀이 됨을 기록했기 때문이니, 용(庸)은 씀(用)이라. 공자의 손자인 자사 급이 지어서 거룩하신 조상의 덕을 밝혔다.”고 하니라. 이는 별록 가운데 통론에 속하니라.
[주자 章句 註] 中者는 不偏不倚하며 無過不及之名이오 庸은 平常也라 子程子曰不偏之謂中이오 不易之謂庸이니 中者는 天下之正道요 庸者는 天下之定理라하니라 此篇은 乃孔門傳授心法이니 子思恐其久而差也라 故로 筆之於書하여 以授孟子하니라 其書始言一理하고 中散爲萬事하며 末復合爲一理하니 放之則彌六合하고 卷之則退藏於密하여 其味無窮하니 皆實學也라 善讀者玩索而有得焉면 則終身用之라도 有不能盡者矣리라
중(中)은 치우치지도 않고 기울어지지도 않으며 지나치거나 미치지 못함도 없음을 이름하고, 용(庸)은 평상이라. 정자 선생께서 가로대 “치우치지 않은 것을 중(中)이라 하고, 바꾸지 않는 것을 용(庸)이라고 하니, 중은 천하의 바른 도이고, 용은 천하의 정한 이치라.”고 하니라. 이 편은 공문의 전수의 심법이니, 자사가 그 오래되어 어긋날까를 두려워했으므로 글로 기록하여 맹자에서 주었느니라. 그 글이 처음에는 하나의 이치를 말하고, 중간에는 흩어서 만사를 다뤘으며, 끝에서는 다시 합하여 하나의 이치를 다뤘느니라. 펴면 육합을 미륜(彌綸)하고, 말면 물러가 은밀한 데에 감추어서 그 맛이 무궁하니 다 실질적인 학문이라. 읽기를 잘하는 자가 깊이 생각하여 찾아서 얻음이 있다면 종신토록 쓰더라도 능히 다하지 못함이 있으리라.
[家苑 註] 『주역』 乾卦 文言傳 제2절 가운데 九二爻에 대해 “子曰龍德而正中者也니 庸言之信하며 庸行之謹하여 閑邪存其誠하며 善世而不伐하며 德博而化니 易曰見龍在田利見大人이라하니 君德也라(공자 가라사대, 용의 덕이면서 바로 가운데 한 것이니, 떳떳한 말을 미덥게 하며 떳떳한 행실을 삼가 삿됨을 막고 그 정성을 보존하며 세상을 선하게 하여도 자랑하지 아니하며 덕이 넓어 교화하니, 역에 가로대 현룡재전이견대인이라하니, 인군의 덕이라.)”는 내용에서 볼 수 있 수 있듯이 中庸은 “龍德而正中者”의 中과 “庸言之信 庸行之謹”의 庸에서 유래한다. 곧 『중용』에서 가르치는 군자의 덕은 바로 하늘의 덕을 바탕으로 세워나가야 함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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朱子의 中庸章句序(1)
(이 글은 朱子가 儒學의 道脈을 정리한 글로 유명하다.)
中庸은 何爲而作也오 子思子 憂道學之失其傳而作也시니라 蓋自上古로 聖神이 繼天立極하여 而道統之傳이 有自來矣라 其見於經則允執厥中者는 堯之所以授舜也요 人心은 惟危하고 道心은 惟微하니 惟精惟一이라사 允執厥中者는 舜之所以授禹也니 堯之一言이 至矣盡矣어시늘 而舜이 復益之以三言者는 則所以明夫堯之一言이 必如是而後에 可庶幾也니라
『중용』은 어찌하여 지었는고? 자사선생이 도학의 그 전함을 잃을까를 근심하여 지으셨느니라. 대개 상고로부터 성신이 하늘을 잇고 극을 세워 도통의 전함이 이로부터 있음이라. 그 경(『書經』 虞書 大禹謨편)에 나타난즉 미덥게 그 중을 잡는다(允執厥中)는 것은 요임금이 순임금에게 주신 바이고, 사람의 마음은 오직 위태하고(人心惟危), 도의 마음은 오직 미미하니(道心惟微), 오직 정미하고 오직 한결 같게 하여야(惟精惟一) 미덥게 그 중을 잡는다는 것은 순임금이 우임금에게 주신 바이니, 요임금의 한 말씀이 지극하고 다하셨거늘 순임금이 다시 세 가지 말로 더한 것은 곧 무릇 요임금의 한 마디 말씀이 반드시 이와 같이 한 뒤에 가히 거의 밝아지기 때문이니라.
蓋嘗論之컨대 心之虛靈知覺이 一而已矣로대 而以爲有人心道心之異者는 則以其或生於形氣之私하며 或原於性命之正하여 而所以爲知覺者 不同일새 是以로 或危殆而不安하며 或微妙而難見耳라 然이나 人莫不有是形이라 故로 雖上智라도 不能無人心하고 亦莫不有是性이라 故로 雖下愚라도 不能無道心하니 二者 雜於方寸之間하여 而不知所以治之면 則危者 愈危하여 微者 愈微하여 而天理之公이 卒無以勝夫人欲之私矣리라 精則察夫二者之間而不雜也요 一則守其本心之正而不離也니 從事於斯하여 無小間斷하여 必使道心으로 常爲一身之主하고 而人心이 每聽命焉則危者 安하여 微者 著하여 而動靜云爲 自無過不及之差矣리라
대개 일찍이 논하건대, 마음의 허령(虛靈 ; 마음이 잡념 없이 신령스러움)과 지각(知覺 ; 알아서 깨달음)이 하나일 따름인데, 인심과 도심이 다름이 되는 까닭은 곧 그 혹 형체와 기운의 사사로움에서 나오며 혹 성명의 바름에 근원하여 지각하는 바가 같지 않기 때문에 이로써 혹 위태롭고 불안하며 혹 미묘해서 보기가 어려울 뿐이라. 그러나 사람이 이 형체를 두지 않음이 없느니라. 그러므로 비록 상지(上智)라도 능히 인심이 없지 아니하고 또한 이 성품을 두지 않음이 없느니라. 그러므로 비록 하우(下愚)라도 능히 도심이 없지 아니하니, 두 가지가 사방 한 치 사이에 섞여서 다스리는 바를 알지 못하면, 곧 위태로운 자더욱 위태로워지고 미미한 자는 더욱 미미해져 천리의 공변됨이 마침내 무릇 인욕의 사사로움을 이김이 없으리라. 정미하면 무릇 두 가지 사이를 살펴서 섞이지 않고, 한결같으면 그 본심을 바름을 지켜 떠나지 아니하니, 일을 이에 따라서 조금도 사이에 끊어짐이 없어야 반드시 도심으로 하여금 항상 일신의 주장을 삼고, 인심이 매번 명을 듣는다면 위태로운 자는 편안해지고 미미한 자는 나타나서 움직이고(動) 고요하고(靜) 말하고(云) 행함(爲)이 저절로 과불급의 차이가 없어지리라.
夫堯舜禹는 天下之大聖也시고 以天下相傳은 天下之大事也니 以天下之大聖으로 行天下之大事하사 而其授受之際에 丁寧告戒 不過如此하시니 則天下之理 豈有以加於此哉리오 自是以來로 聖聖이 相承하시니 若成湯文武之爲君과 陶伊傅周召之爲臣이 旣皆以此而接夫道統之傳하시고 若吾夫子는 則雖不得其位시나 而所以繼往聖開來學하시니 其功이 反有賢於堯舜者시니라 然이나 當是時하여 見而知之者는 惟顔氏曾氏之傳이 得其宗하시고 及曾氏之再傳하여 而復得夫子之孫子思하니 則去聖이 遠而異端이 起矣라
무릇 요순우는 천하의 대성이시고, 천하로 서로 전함은 천하의 대사니, 천하의 대성으로 천하의 대사를 행하시어 그 수수하는 즈음에 정녕 알려주고 경계함이 이 같음을 넘지 않으셨으니, 곧 천하의 이치가 어찌 여기에 더함이 있으리오. 이로부터 이래로 성인과 성인이 서로 이으셨으니, 성탕과 문무 같으신 이의 인군 됨과 고요(皐陶)와 이윤(伊尹)과 부열(傅說)과 주공(周公)과 소공(召公)의 신하됨이 이미 다 이로써 하여 무릇 도통의 전함을 접하셨고, 우리 부자 같으신 이는 비록 그 위는 얻지 못하셨으나 지나간 성인을 이으시고 후학들을 열어주셨으니 그 공이 도리어 요순보다 나음이 있음이라. 그러나 이 때를 당하여 보고 아는 자는 오직 안씨와 증씨의 전함만이 그 종을 얻으셨고, 증씨의 재전에 이르러 다시 부자의 손자인 자사를 얻으셨으니, 곧 성인과의 거리가 멀어지며 이단이 일어났느니라.
子思 懼夫兪久而愈失其眞也하사 於是에 推本堯舜以來相傳之意하시고 質以平日所聞父師之言하사 更互演繹하여 作爲此書하여 以詔後之學者하시니 蓋其憂之也 深이라 故로 其言之也 切하고 其慮之也 遠이라 故로 其說之也 詳하니 其曰天命率性은 則道心之謂也요 其曰擇善固執은 則精一之謂也요 其曰君子時中은 則執中之謂也라 世之相後 千有餘年이로대 而其言之不異 如合符節이라 歷選前聖之書하여 所以提挈綱維하며 開示蘊奧 未有若是之明且盡者也라 自是而又再傳以得孟氏하여 爲能推明是書하여 以承先聖之統이러시니 及其沒而遂失其傳焉하니 則吾道之所寄 不越乎言語文字之間하고 而異端之說이 日新月盛하여 以至於老佛之道 出하여 則彌近理而大亂眞矣라
자사가 무릇 더욱 오래됨에 더욱 그 참을 잃을까를 두려워하시어 이에 요순 이래로 서로 전한 뜻을 미루어 근본으로 하시고, 평일에 들은 바 아버지와 스승의 말씀을 바탕으로 하시어 다시 서로 넓히고 이어서 이 글을 지어서 뒤에 배우는 자에게 알려주시니, 대개 그 근심하심이 깊었음이라. 그러므로 그 말씀이 간절하고, 그 염려하심이 멂이라. 그러므로 그 설명이 상세하니, 그 천명과 솔성이라고 함은 곧 도심을 이르고, 그 택선고집이라고 함은 정일(精一)을 이르고, 그 군자시중이라고 함은 집중을 이름이라. 세대의 서로 뒤 함이 천 여 년이로되 그 말의 다르지 않음이 여합부절이라. 앞선 성인의 글을 차례대로 가려서 이로써 벼리를 끌고 당긴 바이며, 온오함을 열어 보여줌이 이같이 밝고 또 다한 것은 있지 않음이라. 이로부터 하여 또 두 번 전하여 맹씨를 얻어 능히 이 글을 미루어 밝혀서 선성의 법통을 이으시더니, 그 돌아가심에 이르러 마침내 그 전함을 잃었으니, 곧 우리 도의 부친 바가 언어 문자 사이를 넘지 못하고, 이단의 말이 날로 새롭고 달로 성해서 노불의 도가 나오는데 이르러서 곧 더욱 이치에 가까워 크게 참을 어지럽힘이라.
挈 이끌 설 綱維(강유) 벼리, 골자 蘊 쌓일 온 奧 깊을 오 寄 부칠 기
然而尙幸此書之不泯이라 故로 程夫子兄弟者 出하사 得有所考하여 以續夫千載不傳之緖하시고 得有所據하여 以斥夫二家似是之非하시니 蓋子思之功이 於是爲大요 而微程夫子면 則亦莫能因其語而得其心也리라 惜乎라 其所以爲說者 不傳而凡石氏之所輯錄이 僅出於其門人之所記하니 是以로 大義 雖明而微言이 未析하고 至其門人之所自爲說하여는 則雖頗詳盡而多所發明이나 然이나 倍其師說而淫於老佛者 亦有之矣라
그런데 오히려 다행히도 이 글이 없어지지 않음이라. 그러므로 정부자 형제(북송 시기의 사람으로 明道先生으로 부르는 형인 程顥와 伊川先生으로 부르는 아우 程頤를 말함)가 나오시어 상고할 바를 얻어서 무릇 천 년 동안 전하지 못했던 단서를 이으시고, 근거할 바를 얻어서 무릇 두 집(老佛인 道家와 佛家)의 옳은 것 같으면서도 그른 것을 배척하시니, 대개 자사의 공이 이에서 커졌고, 정부자가 아니었으면 또한 능히 그 말로 인하여 그 마음을 얻지 못했으리라. 아, 아깝도다! 그 설명한 바가 전하지 못하고 무릇 석씨가 모아서 기록한 바가 겨우 그 문인의 기록한 바에서 나왔으니, 이로써 큰 뜻은 비록 밝으나 은미한 말이 따개지지 못하고 그 문인이 스스로 말을 한 곳에 이르러서는 곧 비록 자못 자세히 다하여 펼쳐서 밝힌 바가 많으나, 그러나 그 스승의 말씀을 거스르고 노불에 빠진 것이 또한 있느니라. 泯 빠질 민 倍 등질 패
熹自蚤歲로 卽嘗受讀而竊疑之하여 沈潛反復이 蓋亦有年이러니 一旦에 恍然하여 似有得其要領者나 然後에 乃敢會衆說而折其衷하여 旣爲定著章句一篇하여 以俟後之君子하고 而一二同志로 復取石氏書하여 刪其繁亂하여 名以輯略하고 且記所嘗論辨取舍之意하여 別爲或問하여 以附其後하니 然後에 此書之旨 支分節解하여 脉絡貫通하며 詳略相因하고 巨細畢擧하여 而凡諸說之同異得失이 亦得以曲暢旁通하여 而各極其趣하니 雖於道統之傳에 不敢妄議나 然이나 初學之士 或有取焉이면 則亦庶乎行遠升高之一助云爾라 淳熙 己酉 春三月 戊申에 新安 朱熹는 序하노라
희(熹)가 이른 나이부터 이미 일찍이 받아 읽고 그윽이 의심하여 푹 잠겨 반복함이 대개 또한 몇 해이더니 하루아침에 어슴푸레 그 요령을 얻은 듯했으나 그런 뒤에 이에 감히 여러 설을 모으고 그 가운데를 끊어서(折衷하여) 이 ‘장구(章句)’ 한 편을 지어 정하여 뒤의 군자를 기다리고, 뜻이 같은 한 두 사람으로 다시 석씨의 글을 취하여 번거롭고 어지러운 것을 깎아 간결하게 하여 ‘집략(輯略)’이라 이름 짓고, 또 일찍부터 변론하며 취사한 뜻을 다 기록하여 별도로 ‘혹문(或問’을 지어 그 말미에 붙였으니, 그런 뒤에 이 글의 뜻이 가지가 나눠지고 마디가 풀려서 맥락이 관통하며, 자세하고 간략함이 서로 인하고, 크고 작은 것이 다 들어져 무릇 저 설명의 같고 다름과 얻음과 잃음이 또한 곡진히 펴지고 두루 통하여 각각의 취지를 다하니, 모름지기 도통의 전함에 감히 망령되이 의논을 못하나 그러나 처음 공부하는 선비들이 혹 취함이 있다면 곧 또한 먼 길을 가고 높은 곳을 오름에 일조하기를 바랄 뿐이라. 순희(남송 孝宗의 연호) 기유년 춘삼월 무신일(1189년 3월 무신일 즉 3월 18일로 주자 나이 60세)에 신안 주희는 서하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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朱子의 讀中庸法 (2)
朱子曰中庸一篇은 某妄以己意로 分其章句하니 是書豈可以章句로 求哉리오 然이나 學者之於經에 未有不得於辭而能通其意者니라 又曰中庸은 初學者 未當理會니라 中庸之書難看이니 中間에 說鬼說神은 都無理會하니 學者須是見得箇道理了라야 方可看此書將來印證이라
주자 가라사대, 『중용』 한 편은 내가 망령되이 내 뜻으로써 그 문장과 글귀를 나누었으니 이 글이 어찌 가히 장구로 구하리오. 그러나 경문을 배움에 말을 얻지 못하고 능히 그 뜻을 통하는 자가 있지 않느니라. 또 가라사대, 『중용』은 초학자가 마땅히 이해를 못하니라. 『중용』 의 글은 보기가 어려우니, 중간에 귀(鬼)를 설명하고 신(神)을 설명한 것은 도무지 이해하지 못하니 배우는 자가 모름지기 이 개개의 도리를 보아야 바야흐로 이 글이 장래에 인증됨을 볼 수 있느니라.
讀書之序는 須是且著力去看大學하고 又著力去看論語하고 又著力去看孟子하여 看得三書了면 這中庸은 半截都了니라 不用問人하고 只略略恁看過요 不可掉了易底하여 却先去攻那亂底니라 中庸은 多說無形影하고 說下學處少하고 說上達處多하니 若且理會文義則可矣니라
글을 읽는 순서는 모름지기 또한 힘을 부쳐 가서 『대학』을 보고, 또 힘을 부쳐 가서 『논어』를 보고, 또 힘을 부쳐 가서 『맹자』를 보고서 세 글을 마치고 보면 이 『중용』은 반쯤 꺾어서 다 마치니라. 사람들에게 묻지 말고 다만 대략 보고 지나가고, 가히 잡았다고 쉽게 이른다고 여겨 도리어 먼저 가서 저 어려운 곳을 공격하여 이르지는 못하니라. 『중용』은 설명함에 형체나 그림자가 없는 것이 많고, 아랫단계의 배움(下學處)을 설명함이 적고, 위로 달하는 곳(上達處)을 설명함이 많으니, 만약 또한 글 뜻을 이해한다면 가하니라.
著 나타날 저, ‘붙일 착’ 這 이 저 截 끊을 절 都 모두 도, 도무지 도 恁 이것 임 掉 흔들릴 도, 바로잡을 도 底 밑 저, 어조사 저, ‘이를 지’ 却 문득 각 那 여기 나, 이것 나
讀書는 先須看大綱하고 又看幾多間架니 如天命之謂性率性之謂道修道之謂敎는 此是大綱이오 夫婦所知所能과 與聖人不知不能處는 此類是間架니라 譬人看屋에 先看他大綱하고 次看幾多間하고 看內又有小間然後에 方得貫通이니라 又曰中庸은 自首章以下로 多對說將來하여 直是整齊니라
글을 읽음은 먼저 모름지기 대강을 보고 또 여러 가지 많은 사이의 칸살(조목)을 볼 것이니, ‘天命之謂性’과 ‘率性之謂道’와 ‘修道之謂敎’와 같은 것은 이에 대강이고, ‘夫婦所知所能’과 ‘聖人不知不能處’는 이런 종류는 칸살이니라. 비유컨대 사람이 집을 봄에 먼저 저 대강을 보고 다음에 많은 칸들을 보고 또 안에 작은 칸들이 있음을 보고 난 연후에야 바야흐로 관통하니라. 또 가라사대, 『중용』은 머릿장부터 아래로 장차 올 것을 대비하여 많이 설명하여 바로 정돈되고 가지런해지니라.
某舊讀中庸할새 以爲子思做러니 又時復有箇子曰字하니 讀得熟後에 方見得是子思參夫子之說하사 著爲此書로라 自是로 沈潛反覆하여 遂漸得其旨趣하고 定得今章句擺布得來하여 直恁麽細密이니라 近看中庸이라가 於章句文義間에 窺見聖賢述作傳授之意 極有條理하여 如繩貫棊局之不可亂이라
내가 옛적에 『중용』을 읽을 때 자사가 지은 것으로 알았더니, 또 때로 다시 여러 개의 ‘자왈’이란 글자가 있으니, 숙독한 뒤에야 바야흐로 자사가 부자의 말씀을 참작하시어 이 글을 지었음을 보았노라. 이로부터 침잠하고 반복하여 마침내 점차 그 뜻을 얻고, 지금의 장구를 펼쳐서 얻어 와 정하여 바로 이와 같이 세밀해졌느니라. 요사이 『중용』을 보다가 장구와 글의 뜻 사이에 성현이 기술하고 창작하고 전수한 뜻이 지극히 조리가 있어서 노끈으로 바둑판을 꿴 듯이 가히 어지럽지 않음을 엿보았노라.
做 지을 주 參 헤아릴 참 擺 펼 파, 벌여놓을 파 布 펼 포 恁麽(이것 임, 어조사 마) 이와 같이 繩 노끈 승 棊 棋(바둑 기)와 同字
中庸은 當作六大節看이니 首章이 是一節이니 說中和요 自君子中庸以下十章이 是一節이니 說中庸이오 君子之道費而隱以下八章이 是一節이니 說費隱이오 哀公問政以下七章이 是一節이니 說誠이오 大哉聖人之道以下六章이 是一節이니 說大德小德이오 末章이 是一節이니 復申首章之意니라
『중용』은 마땅히 6대절로 지어볼 것이니, 머릿장이 한 절이니 中和를 설명하고, ‘君子中庸’부터 이하 10장이 한 절이니 중용을 설명하고, ‘君子之道費而隱’ 이하 8장이 한 절이니 費隱을 설명하고, ‘哀公問政’ 이하 7장이 한 절이니 誠을 설명하고, ‘大哉聖人之道’ 이하 6장이 한 절이니 大德小德을 설명하고, 끝장이 1절이니 다시 머릿장의 뜻을 폈느니라.
問中庸大學之別이어늘 曰如讀中庸하여 求義理는 只是致知工夫요 如謹獨修省은 亦只是誠意니라 問只是中庸에 直說到聖而不可知處로소이다 曰如大學은 裏也니 有如前王不忘이 便是篤恭而天下平底事니라
『중용』과 『대학』의 다름을 묻거늘 가라사대, 『중용』을 읽어서 의리를 구함은 다만 ‘致知’의 공부이고, ‘謹獨修省’은 또한 다만 ‘誠意’니라. 묻기를 다만 『중용』에 바로 성인에 이르는 곳만 설명했지 어느 곳인지를 알지 못하겠나이다. 가라사대, 대학은 속과 같으니, ‘前王不忘’이 문득 ‘篤恭而天下平’에 이르는 일과 같으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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