新聞column

[김진국 칼럼] 자정 능력 잃은 기득권은 무너진다

bindol 2020. 6. 2. 05:26

김진국 중앙일보 대기자 칼럼니스트

역사의 힘은 강하다. 충격적인 집단 경험은 큰 상처를 남긴다. 특정 세대에 낙인처럼 남는다. 세월호는 가장 가까운 아픔이다. 되돌아보면 일제 식민지가 그렇고, 6·25가 또 큰 비극이다.

여야 정치권 모두 과거사 팔이
선악 프레임 만들어 주류 장악한
민주화 세대도 이미 기득권 돼
젊은층, 각 진영 불공정 못 참아

더 가까이는 광주민주화운동이 있다. 국민을 지켜야 할 국군이 시민을 향해 발포했다. 그때 광주에서 벌어진 참혹함을 총격이라는 한 마디로는 담을 수가 없다. 평화적 시위가 좌절됐고, 젊은이들은 절망했다. 대학생들의 분신이 이어졌다. ‘주사파’라는 극단적인 저항이 대학가를 휩쓸었다. 그들이 경험했던 충격을 생각하면 이런 비이성적인 일탈들마저 이해가 간다.

당시 대학 1학년들이 올해 60이 됐다. 그 경험을 함께 나누며 자라온 세대가 우리 사회를 채웠다. 그동안 우리 사회는 엄청나게 바뀌었다. 쿠데타를 일으켰던 전두환·노태우 전 대통령이 재판을 받고, 수감 생활을 했다. 여야 정권교체가 이뤄지고, 사형수가 대통령이 됐다. 우리 사회의 주류가 바뀌었다.

과거는 냉혹하다. 한번 새겨진 낙인은 쉽게 지워지지 않는다. 6월 항쟁의 주역들이 주류로 커오는 동안 보수 정당은 자기만의 추억에 묻혀 살았다. 자신들의 업적을 몰라주는 젊은 세대를 훈계했다. 6·25를 거치며 다져온 반공주의, 냉전적 사고, 보릿고개를 넘던 눈물 자국이 얼룩진 산업화의 영광…. 어쩌면 촛불시위 이후 이어진 지방선거, 21대 총선의 참패는 예정된 길이었다. 자신이 불러온 과거사, 여당이 만들어준 과거사의 프레임 속으로 스스로 걸어 들어갔다.

거대 양당은 모두 추억팔이로 기득권을 지켜왔다. 미래는 없고, 과거만 있다. 정치 갈등은 과거사 프레임 다툼이었다. 한쪽은 ‘쌍팔년도’(1955년·단기 4288년)의 ‘라떼’(나 때) 시리즈를 반복했다. 그사이 다른 한쪽은 과거사를 독점했다. 일제부터 촛불까지 모든 사건을 선과 악의 대결로 만들었다. 자신을 선으로, 경쟁 정당을 악의 화신, 적폐로 규정했다. 이런 프레임이 성공했다.

보수 정치인들은 그 프레임에 갇혔다. 김영삼 전 대통령은 집권 이후 과거 민정계를 쳐냈지만, 정권을 빼앗긴 보수당은 다시 자유당으로, 공화당으로, 민정당으로, 화려했던 추억을 다시 불러들였다. 탄핵을 당하고 나서도 박근혜 전 대통령 사진을 내세우며 거리 행진을 계속했다. 코로나가 길을 가로막을 때까지.

그사이 진보 진영은 과거사를 장악했다. 민주화는 국민의 힘으로 했지만, 그들만의 공이 됐다. 위안부 할머니들이 피해자지만 그들의 권리가 됐다. 화해치유재단 관계자는 합의 당시 시민단체가 보호하는 일부 피해자 할머니를 만날 수 없다고 하소연했다. 피해자 80% 이상이 동의했지만, 재단은 해체됐다. 그 틀도 자의적이다. 6·25 전쟁 당시 북한의 고위직이었던 독립투사는 서훈이 검토된다. 6·25 전쟁 영웅은 일본군 경력 탓에 국립현충원에서 쫓겨날 형편이다.

정책들도 과거사의 틀로, 이념으로 재단된다. 80년대 ‘운동권 교과서’가 선악을 가르는 기준이다. 미국의 베트남 전쟁에 대한 비판, 문화대혁명에 대한 찬양, 탈원전 정책은 타협이 어려운 이념으로 굳어졌다. 실용과 실리는 끼어들 여지가 없다. 반독재 연대의 기억이 진영의 동지애로 뭉치게 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1980년 사형수 시절 “내가 죽더라도 정치 보복은 없어야 한다” “나에 대한 악을 행한 사람들을 일체 용서하겠다”고 했다. 87년 선거 때도 “춘향이의 한은 이 도령을 만나는 것으로 풀어지는 것이지 보복을 해서 풀어지는 게 아니다”는 말을 수도 없이 반복했다.

 


정치 보복은 끝없이 반복한다. 김 전 대통령은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않는다”며 민주주의와 인권을 유린한 제도를 바꿔야 한다고 강조했다. 세월호가 문제면 선박 검사와 구난 매뉴얼을 강화해야 한다. 대통령이 전횡하면 권력을 분산해야 한다. 그러나 제도는 그대로 두고, 적폐 청산만 한다. 사람만 바꾸어서는 그런 일이 반복된다. 나는 다를까? 다르지 않다.

민주화 세대도 이미 기득권 세력이다.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해주던 엄혹한 시절이 아니다. 민주화 운동을 하며 어쩔 수 없이 어겼던 집시법이 아니다. 우리 편이라고 감싸는 건 특권이고, 부패다. 조국 전 법무부 장관, 윤미향 의원 사건은 상징적이다.

20대가 보수라고 한다. 아니다. 60~70대와는 다르다. 기득권과 새 기득권 세력들의 피해 세대일 뿐이다. 그들이 왜 최순실의 딸이 말을 타고 대학에 가고, 대학교수의 딸이 스펙을 만들어 의전원에 들어가고, 시민운동가의 딸이 불투명한 돈으로 해외여행과 유학 가는 것을 인정해야 하나. 그들은 땀 흘려 얻은 올림픽 출전권을 정치적 이유로 북한 선수에게 넘기는 것에도 분개했다. 기회가 공정하지 않았으니까.

자본주의는 왜 망하지 않았을까. 변했기 때문에 살아남았다. 중요한 건 자정 능력이다. 오히려 혁명가들의 공산국가는 기득권의 성에서 무너졌다. 특권층이 된 줄도 모르고, 자정할 능력이 없으면 무너지는 게 당연하다.

김진국 중앙일보 대기자·칼럼니스트

[출처: 중앙일보] [김진국 칼럼] 자정 능력 잃은 기득권은 무너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