끼리끼리 모여 자신을 가두고 독립적 사유 못하는 小人들
최진석 서강대학교 철학과 명예교수·사단법인 새말새몸짓 이사장
공자가 남긴 말 가운데 군자는 특정한 그릇에 제한되는 정도의 사람이 아니라는 '군자불기(君子不器)'가 있다. 특정한 그릇에 갇히면 군자가 아니다. 군자라고도 불리는 수준 높은 사람은 모든 일에 통하는 근본을 지키지 제한된 범위에서 움직이는 기능에 빠지지 않는다. '논어'의 바로 이어지는 문장에 의하면, 군자는 '주이불비(周而不比)'하는 사람이기도 하다. 근본을 지켜서 널리 통하기 때문에 태도는 넓고 매우 공적이다. 반대로 소인은 '비이부주(比而不周)'한다. 기능적으로 같은 주장을 공유하는 자들끼리 뭉쳐서 패거리에 자신을 가둔다. 패거리는 공적이기보다는 더 사적이다. 군자와 소인의 차이는 德 군자와 소인 사이에 이런 차이를 만들어 내는 것은 무엇인가. '덕(德)'이다. '덕'은 사람을 사람으로 살게 하는 가장 뿌리가 되는 활동력이다. 사람을 사람이게 하는 근본이다. '비이부주'하여 끼리끼리 같은 주장으로 뭉쳐 그 안에서 진리성과 영광을 공유하며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고 과시하는 자들을 '향원(鄕原)'이라 하는데, 공자는 '향원'을 '덕의 파괴자'로 본다. 집단의 주장을 자기가 한 인식인 양 알고 사는 사람은 덕을 놓친 격이고, 자신의 인식을 바탕으로 독립적이고 자유로운 태도를 취하는 사람은 덕을 지킨 격이다. '우리'의 소리가 뻔한데, 그것을 '내' 소리로 삼을 뿐 아니라 그것을 진리인 양 휘두르면 대개는 향원이다. 덕을 파괴하는 자는 세상도 파괴한다.
/일러스트=김영석
염치가 없으면 인간성도 없다
'우리'들끼리 공유하는 정해진 주장들은 질문이 튀어나오는 데에 방해가 된다. '나'에게만 있는 호기심이 주도권을 잡아야 튀어나온다. 호기심은 나를 나이게 하는 근본 활동력이자 근본 동력이라는 점에서 '덕'의 표정을 가졌다. 내가 아는 한, '덕'은 호기심에 가장 가깝다. 호기심은 외부 대상에 관심을 갖는 정도에 멈추는 것이 아니라 아직 해석되지 않은 곳으로 건너가는 일을 시작하게 해주는 원초적인 힘이다. 불교적으로 말하면 최고의 지혜인 바라밀다의 출발역이다. 대답은 덕이 직접적으로 작용한 것이라기보다는 지식과 이론을 제한된 통로로 내보내는 기능적인 활동이지만, 질문은 덕이 실현되는 한 형태이다. 이 세상에 출현한 모든 것이 질문의 결과라면, 세상 자체를 덕 있는 자의 공적으로 볼 수도 있다. 덕을 파괴하는 자는 도저히 할 수 없는 일이다. 향원은 질문하는 자가 될 수 없다. 대답하는 습관은 의식을 과거를 지향하게 하고, 질문하는 자의 의식은 언제나 미래를 향한다. 결국 향원은 과거를 산다는 말이다. 향원의 인도를 받는 자들도 모두 과거를 살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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