新聞column

[만물상] '기억 안 나지만 혐의는 인정한다'

bindol 2020. 6. 4. 05:16

미국 조지 W 부시 정부의 법무 장관이었던 알베르토 곤살레스는 연방검사를 무더기 해임하고 국가안보국의 비밀 도청을 승인했다는 이유로 의회와 대립했었다. 정작 그가 사퇴할 수밖에 없었던 건 거의 모든 질문에 "기억나지 않는다"고 말했기 때문이다. 그는 2007년 4월 19일 의회에 출석해 71번이나 "기억나지 않는다"고 대답했다. 당시 미국 언론들은 "진짜 잘못했거나 진짜 멍청이인 모양이다. 아마도 둘 다일 것"이라고 했다.

▶'기억나지 않는다'는 말은 뭔가 잘못한 사람이 '아니다'와 '모른다'로 감출 수 없는 증거 앞에서 마지막으로 도피하는 말인 경우가 많다. 조국씨 아내 정경심씨는 남편의 조카와 주고받은 사모펀드 투자 관련 문자가 공개되자 "기억나지 않는다"는 대답으로 일관했다. 국회의원이 된 윤미향씨는 2012년 이용수 할머니의 비례대표 출마를 자신이 말렸다는 녹취록이 공개되자 "기억나지 않는다"고 했다. 그런데 "기억이 나지 않는다"는 사람들이 자신에게 유리한 일은 너무나 또렷하게 기억해내곤 한다.

 

 

▶여직원을 강제추행한 혐의를 받는 오거돈 전 부산시장이 영장실질심사에서 "기억은 나지 않지만 혐의는 인정한다"는 취지로 말했다고 한다. 4월 7일에 성추행을 했고 그 직후 피해자가 성폭력상담소에 신고해 '4·15 총선 후에 사퇴한다'는 문서를 공증까지 받았다. 4월 23일에 사퇴한 뒤로는 경찰 수사를 받아왔다. 기억이 나지 않을 수가 없다.

▶'기억 안 나지만 혐의는 인정한다'는 것은 '그런 짓을 했는지 안 했는지 모르지만, 했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이렇게 모순되고 황당한 말을 하는 것은 상당히 계산된 것이라고 한다. 혐의를 인정해야 구속을 면하는 데 유리하다. 그렇지만 '기억이 안 난다'고 한 자락을 깔아둬야 나중에 재판에서 혐의 내용을 다툴 수 있다.

▶거의 불가능한 일이지만 정말 기억이 안 날 수도 있다고 한다. 너무나 충격적인 사태에 직면한 사람이 머릿속에서 그 기억을 지워버릴 수 있다는 것이다. 같은 거짓말을 수십, 수백 번 반복한 사람이 나중엔 그것이 거짓말인지 아닌지 스스로도 헷갈리게 되는 것과 같다. 오 전 시장은 머릿속에서 그 일을 지워버렸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는 사퇴 후 잠적했다가 거제도에서 취재진과 맞닥뜨리자 "사람 잘못 보셨습니다"라고 했다. '나는 오거돈이 아니다'라고 생각하다 굳어진 것이 아니라면 거짓말을 한 것이다. '성추행 기억 안 난다'도 거짓말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20/06/03/2020060304979.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