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정호 논설위원
얼마나 미워했으면 이런 족보까지 만들었을까. 유교사회 조선의 사대부들이 족보를 만들어 가문의 전통을 이어간 건 누구나 아는 상식이지만 당대 명문가들이 원수 관계에 있는 상대방 가족까지 기록해 후세에 전했다는 사실은 최근에야 알았다. 이른바 세혐보(世嫌譜)다. 세혐은 두 집안 사이에 대대로 내려오는 원한을 말한다. 오랜 세월 척진 집안을 혐가(嫌家)·수가(讐家) 등으로 표현했다. 조선 후기 유행한 ‘세혐보’ 세혐보를 만든 목적은 명확했다. 상대 가문과 혼인은 물론 교류를 금하려는 뜻에서다. 세대가 쌓일수록, 즉 상대의 후손이 많아질수록 구성원을 기억하기 어려워졌기에 일종의 ‘블랙 리스트’를 작성했다. 많을 경우 서로 피해야 할 가문이 수십 군데에 이르렀다. 수록된 인원수가 3000여 명에 달하기도 했다. 제작 배경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붕당(朋黨) 정치와 관계가 깊다. 배제의 정치, 타자의 정치다. ![]() 서울 인사동 고서문화를 지켜온 김영복(왼쪽) 케이옥션 고문과 여승구 화봉문고 회장. 서로 ‘인사동의 대부’ ‘인사동의 천재’라고 추켜세웠다. [중앙포토] 현재까지 조사된 세혐보는 그리 많지 않다. 세월이 흐르면서 보관 순위에서 밀려 유실되거나, ‘증오의 유물’에 대한 후손들의 부정적 인식이 작용했을 가능성이 크다. 그 세혐보 한 권을 지난 2일 서울 인사동 화봉문고 전시장에서 만났다. 누렇게 퇴색된 표지에 적힌 『수혐록(讐嫌錄)』 세 글자가 또렷했다. 19세기에 제작된 필사본으로, 대부분 남인과 소론계 집안을 수록했기에 노론계 집안에서 작성한 것으로 판단된다. ![]() 『수혐록(讐嫌錄)』 표지 이달 말까지 열리는 이번 전시엔 ‘기록의 나라’ ‘활자의 나라’였던 조선의 구석구석을 보여주는 전적(典籍) 100종이 나왔다. 전시 제목은 ‘서여기인’(書如己人). ‘글과 책이 곧 사람’이라는 뜻이다. 불경 목판본·활자본·필사본, 김정희·이광사의 문집, 한석봉·강세황의 서첩 등이 두루 나왔다. 전시는 아담하지만 우리 선인들의 서권기(書券氣·책에서 풍기는 기운)를 듬뿍 느낄 수 있다. 서울 인사동에서 고서와 45년을 함께해온 김영복(66) 케이옥션 고문이 평생 수집한 애장품 가운데 엄선한 것이다. 현대인의 일상과 갈수록 멀어지는 옛날 책이나 한국문화 DNA의 바탕을 이루는 귀한 자료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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