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민의 세설신어

[정민의 世說新語] [330] 고태류극

bindol 2020. 8. 3. 06:14


정민 한양대 교수·고전문학



추사(秋史)가 조카 민태호에게 보낸 친필 편지를 읽다가 글 속 언저리를 한참 서성였다. "산촌의 비가 아침에 개었으니 북악산 자락에는 온갖 꽃들이 한꺼번에 피어났겠구나. 예전 비에 옷 젖던 일도 생각나고 해묵은 이끼에 신발 자국이 찍히던 것도 기억나는군.(邨雨朝晴, 想北崦百花盡放. 攬舊雨之沾裳, 記古 之留屐.)" 사각사각 봄비에 꽃들이 일제히 피어나 몽환적 풍경을 연출한다. 나막신을 신고 그 속으로 걸어 들어가자 물기를 머금은 스펀지 같은 이끼 위에 발자국이 또렷이 찍히더니 물이 고인다. 애틋하다. 예전 김일로 시인의 시집 '송산하' 중 "산기슭 물굽이 도는 나그네. 지팡이 자국마다 고이는 봄비"란 구절 앞에서 책장을 덮고 눈을 감았던 기억과 겹쳐졌다.

때마침 문자 하나가 들어온다. 고재식 선생이다. "추사가 치원에게 준 글입니다. 일본에 있는 걸 벗이 아침에 보내줘 가을 문턱 안부로 삼습니다." 함께 전송돼 온 사진을 열자 일본인의 서재에 높이 걸린 추사의 친필이 황금빛 비단 안에 찬연하다. 다산의 제자 치원 황상에게 추사가 써준 시다. 추사를 읽는데 추사가 왔다. 추사의 영혼과 한순간 절묘한 계합(契合)이 이뤄진 듯해서 한동안 마음이 황홀했다.

액자 속 여러 구절 중 한 대목은 이랬다. "매번 방초 볼 때마다 명마를 생각하고, 어쩌다 운산(雲山) 들면 기이한 글 떠올리네.(每因芳艸思名馬, 偶到雲山想異書.)" 과천에 올라왔다가 멀리 강진으로 돌아가는 황상을 전송하며 이렇게 써준 것이다. 방초를 봐도 구름 산에 들어도 이제부턴 네 생각만 날 거라는 뜻이다.

이덕무가 조카 이광석에게 보낸 편지의 서두에 다음 구절이 들어 있다. "밤 삼경에 서상(西庠)에서 오는데 두 사람의 발자국이 봄 이끼 위에 찍혀 있더군. 희미한 달빛이 이를 비추는 바람에 완연히 그대가 떠올랐소." 이광석이 벗과 함께 이덕무의 퇴근을 기다리다 길이 어긋났던 모양이다. 이덕무는 희미한 달빛 아래서 이끼 위에 두 사람의 발자국이 찍힌 것을 보고 안 그래도 네 생각을 했었노라고 했다. 이끼 위 발자국을 따라 오가던 그 마음들이 오늘 문득 그립다.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5/09/01/2015090104237.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