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사(秋史)가 조카 민태호에게 보낸 친필 편지를 읽다가 글 속 언저리를 한참 서성였다. "산촌의 비가 아침에 개었으니 북악산 자락에는 온갖 꽃들이 한꺼번에 피어났겠구나. 예전 비에 옷 젖던 일도 생각나고 해묵은 이끼에 신발 자국이 찍히던 것도 기억나는군.(邨雨朝晴, 想北崦百花盡放. 攬舊雨之沾裳, 記古 之留屐.)" 사각사각 봄비에 꽃들이 일제히 피어나 몽환적 풍경을 연출한다. 나막신을 신고 그 속으로 걸어 들어가자 물기를 머금은 스펀지 같은 이끼 위에 발자국이 또렷이 찍히더니 물이 고인다. 애틋하다. 예전 김일로 시인의 시집 '송산하' 중 "산기슭 물굽이 도는 나그네. 지팡이 자국마다 고이는 봄비"란 구절 앞에서 책장을 덮고 눈을 감았던 기억과 겹쳐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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