千字文 工夫

杜槀鍾隸 漆書壁經

bindol 2020. 11. 13. 08:28

杜槀鍾隸 漆書壁經

 

本文

杜槀鍾隸 漆書壁經 두고종예 칠서벽경

두도(杜度)의 초서(草書) 초고(草稿) 종요(鍾繇)의 예서(隸書)

고전자(古篆字)를 칠()로 쓴 벽경(壁經)도 모두 있다.

 

훈음(訓音)

막을 두 볏짚 고 술병 종 종 례

옻 칠 글 서 벽 벽 경서 경

 

해설(解說)

지난 장에서는 정전(正殿)을 중심으로 좌측의 승명전(承明殿)과 우측의 광내전(廣內殿)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광내전은 장서각(藏書閣)이고, 승명전은 서적을 출판하는 편찬소(編纂所)라 하였습니다. 이 장서각에는 삼분오전(三墳五典)을 비롯한 수많은 서적이 있으며, 또 이곳에는 뛰어난 영재들을 모아 나라를 경륜하는 도리를 연구하고 강론하게 하였음을 공부하였습니다.

이번 장에서는 삼분오전(三墳五典)외에 또 어떤 서적이 있었는가를 알아보겠습니다.

두고종예(杜槀鍾隸) 두도(杜度)의 초서(草書) 초고(草稿) 종요(鍾繇)의 예서(隸書)와 두()는 목() + ()의 형성자(形聲字)입니다. '()''그득히 충실함'의 뜻입니다. 여기에 목()이 덧붙여져 '나무로 막다'의 뜻을 나타냅니다. '교통이 두절(杜絶)되었다.'라고 할 때, 또는 집에만 있고 나가지 않음을 두문불출(杜門不出)이라고 할 때, 이 글자를 씁니다. ()는 장미과에 속하는 낙엽교목(落葉喬木)으로 흰 꽃이 피고 열매는 10월에 익는 팥배나무입니다. 이 나무를 감당(甘棠)이라고도 하며 당리(棠梨)라고도 합니다. 그런데 여 기서는 성()을 말합니다. ()씨 성을 가진 사람들이 많습니다. 성당(盛唐)의 대시인 두보(杜甫), 만당(晩唐)의 시인 두목(杜牧) 등이 있는데 여기서는 후한(後漢)의 두도(杜度)를 말합니다.

()는 고()의 본자(本字)로 목() + ()의 형성자(形聲字)입니다. '()''()'과 통하여, '굳다'의 뜻입니다. 여기에 목()이 붙어서 '나무가 굳어지다, 말라죽다'의 뜻을 나타냅니다. , ()를 화()와 고()의 형성자로 보아, 본뜻은 '볏짚'으로 '초고(草稿) 원고(原稿)'를 뜻합니다. ()는 고(稿), ()로도 씁니다.

()은 금() + ()의 형성자(形聲字)입니다. '()''무겁다'의 뜻입니다. 금속제의 무거운 술잔의 뜻을 나타냅니다. '()''겹치다'의 뜻도 있어 '겹쳐서 오다, 모이다'의 뜻도 나타냅니다. 또 종()은 쇠북 종()과도 통용됩니다.

()는 이() + ()의 회의자(會意字)입니다. '()''붙잡다'의 뜻이고, '()'는 고문(古文)에서는 수()인데 그 뜻을 알 수 없다고 합니다. 죄인이나 이민족을 붙잡아서 '종으로 삼다, 복종시키다'의 뜻을 나타냅니다. 설문(說文)에서 예()는 부착(附着)하는 것이라 했으니 노예를 뜻합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서체(書體)의 하나인 예서(隸書)를 말합니다.

두고종예(杜槀鍾隸)는 두도(杜度)의 초서(草書) 초고(草稿), 종요(鍾繇)의 예서(隸書)라는 말씀입니다.

()는 후한(後漢)의 장제(章帝 재위 75~87) 때의 사람인 두도(杜度)를 말합니다.

두도(杜度)의 생몰년대는 잘 알 수 없다고 합니다. 원래 이름이 두조(杜操)인데 위()나라 무제(武帝) 조조(曹操)의 이름과 같다고 하여 두도(杜度)로 바꾸었다고 합니다. 두도(杜度)의 자()는 백도(伯度)인데 초서(草書)에 능했다고 합니다. 그는 장초체(章草體)의 명필로 알려져 있습니다. 장초(章草)는 초서(草書)의 별칭(別稱)입니다. 그의 글씨가 세상에 알려지자 장제(章帝)가 그를 중용하였고 조정의 글씨는 그가 도맡아 썼다고 합니다.

장초(章草)의 선구는 전한(前漢) 시대의 원제(元帝 재위 BC 49~33) 사유(史游)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는 두도보다 80~100년 전 사람으로 손꼽히는 명필로 알려져 있습니다.

두고(杜槀)는 두도(杜度)의 장초체(章草體)의 초고(草槀. 草稿)를 말합니다. 그런데 초고(草稿)라고 할 때, 여기에서 초()의 의미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일정하게 고정된 글자의 자체(字體)를 말하며, 또 하나는 '초략(草略)한 사법(寫法)'이란 의미로 시문의 초벌 원고(原稿)를 말합니다. 여기서는 초서(草書)로 쓴 문고(文槀)를 말합니다.

()은 이 천자문을 지은 대문장가 종요(鍾繇)를 말합니다. 앞서 천자문을 시각하기 전 종요에 대하여 알아 본 바 있습니다. 그러나 다시 한번 간략하게 알아보겠습니다.

종요(鍾繇 151~230)는 후한 말 삼국시대의 위()나라 때의 정치가이자 문장가로 자()는 원상(元常)이고 예주(豫州) 영천군(潁川郡) 장사현(長社縣) 지금의 허난성(河南省) 창거현(長葛縣) 사람입니다. ()나라에서 정위(廷尉)상국(相國)태위(太尉)태부(太傅)의 관직을 역임하였습니다. 그는 예서(隸書)해서(楷書)행서(行書)초서(草書) 등 모든 서체에 정통하였는데 특히 예서(隸書)에 정통하였고, 예서를 간략하게 한 해서(楷書)를 만든 대가입 니다. 후대에 명필로 유명한 왕희지(王羲之)는 종요의 해서체를 흠모했다고 합니다. 두 명필을 일러 종왕(鍾王)이라 부릅니다.

종예(鍾隸)는 종요(鍾繇)의 예서(隸書)를 말합니다. 종요는 모든 서체에 능했는데 특히 예서(隸書)에 능했다고 앞서 밝힌 바 있습니다. 그러면 예서는 무엇인가 간략히 알아 보겠습니다.

예서(隸書)는 진시황(秦始皇) 때 정막(程邈)이 소전(小篆)을 간략히 하여 만든 서체라고 합니다. 옥중에서 10년을 각고(刻苦) 끝에 만들었다고 합니다. 전서(篆書)가 원세(圓勢)이며 장방형(長方形)인 것을 방세(方勢)로 바꾸어 옆을 넓게 하고 획()을 생략하였기 때문에 훨씬 쓰기 쉽게 만든 것입니다. 주로 노예나 천역(賤役)에 종사하는 자가 사용했으므로 예서(隸書)란 이름을 붙인 것입니다. 예서는 전서(篆書)의 보조체로서 탄생된 것이지만 진()나라가 멸망하고 한()나라가 되자 시대의 정체(正體)로서 표면적으로 사용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예서를 좀더 간략화하고 글자를 명확히 한 해서체(楷書體)가 등장합니다.

글자의 서체(書體) 이야기가 나왔으니 서체의 변천과정을 간략히 살펴보겠습니다. 글자는 우리 생활에 긴요하기 때문에 시대의 필요에 상응하여 변천을 거듭하여 왔습니다. 서체의 변천과정을 보면 최고(最古)의 갑골문(甲骨文)에서 시작하여 은()()의 고문(古文)으로 변천합니다. 고문을 금문(金文)이라고도 합니다. 주나라가 멸망하고 천하는 춘추전국시대로 접어들어 혼란에 빠졌는데 전국시대를 평정하여 천하를 통일한 이가 진시황(秦始皇)입니다. 그는 천하를 통일하고 재상인 이사(李斯)를 시켜 종래의 문자를 정리하게 하는데 이체문자(異體文字)는 폐지하고 전서(篆書)를 제정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전서는 실용적이지 못하여 전서를 간소하게 한 약체(略體)를 사용하게 되었는데 이것이 예서(隸書)의 발생인 것입니다. 예서에는 고례(古隷)와 팔분(八分)의 구별이 있는데 처음에 생긴 직선만으로 약간 전의(篆意)가 있는 것을 고례(古隷)라 하고, 이것을 아름답게 하려고 횡획(橫劃)의 종부(終部)를 누르고 힘차게 삐치었는데 이를 파책(波磔)이라 합니다. 팔자(八字)처럼 삐친다 하여 팔분(八分)이라 합니다. 이 팔분(八分)은 전한(前漢) 때부터 사용되었습니다. 한대(漢代)는 예서(隸書)가 전성(全盛)을 누리었는데 그런 중에도 일반이 상용(常用)하는 체는 예서를 더 간략히 하는 초서(草書) 해서(楷書) 행서(行書)가 발생한 것입니다.

초서(草書)는 팔분(八分)을 간략히 하여 나온 체입니다. 초서에는 장초(章草)와 금초(今草의 구별이 있습니다. 장초(章草)는 전한(前漢) 시대의 사유(史游)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예서 팔분(八分)을 쓰는 필법으로 일점일획을 연결 시키기 않고 떼어서 쓰는 것이 특징인데 획중에 약간 예미(隸味)를 포함하여 종획(終劃에 예()의 파책(波磔)을 지니고 있습니다. 금초(今草)는 오늘 날의 초서(草書)를 말하는데 한()의 장지(張芝)가 창조하였다고 합니다. 장초(章草)의 파책(波磔)을 따서 속서(速書)한 것으로 상하의 자()를 서로 이어받으면서 쓰는 것이 특징입니다.

해서(楷書)는 예서(隸書)를 간략히 하여 나온 것인데 한말(漢末)에 종요에 의해 나온 것입니다. 행서(行書)는 후한(後漢)의 유덕승(劉德昇) 창조했다고 하나 해서와 전후 구별이 어려울 정도로 나왔는데 해서(楷書)에 초의(草意)를 담아 자획(字劃)을 생략한 체입니다.

칠서벽경(漆書壁經) 고전자(古篆字)를 칠()로 쓴 벽경(壁經)도 모두 있다.

()은 수() + ()의 형성자(形聲字)입니다. '()''옻칠'을 뜻합니다. 여기에 '()'를 붙여, 강의 이름을 나타냅니다. , 액체인 ''의 뜻도 나타냅니다. '옻나무, 옻칠'을 뜻합니다. 옻칠은 검기에 '검다'의 의미로도 씁니다.

()는 율() + ()의 형성자(形聲字)입니다. '()'''의 뜻이고, '()'는 섶을 그러모은 모양을 본 뜬 것입니다. '()'와 통하여, '사물을 모아 적다'의 뜻을 나타냅니다. 또는 '붓으로 글씨를 써서 드러낸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서()', 글씨, 쓰다'의 의미로 사용합니다.

()은 토() + ()의 형성자(形聲字)입니다. '()''옆으로 비키다'의 뜻입니다. 여기에 토()를 붙여 방의 옆에 흙으로 만든 벽의 뜻을 나타냅니다. 본뜻은 ''인데 나중에 '바람과 추위를 막는 벽'으로 변했습니다.

()은 사() + ()의 형성자(形聲字)입니다. '()'은 베틀에 세로 곧게, 단단히 켕긴 날실의 상형으로, '날실'의 뜻입니다. ()를 덧붙여 그 뜻을 명확히 했습니다. ()는 가는 실 ''이라도 하는데 보통 사()의 속자로 씁니다. ()의 본뜻은 종사(縱絲)'날실'을 뜻하는데 나중에 '경서(經書) '으로 쓰였습니다. 직물을 짜는데 가장 중요한 근본이며 주축이 되는 것은 '날실'입니다. 이것이 베틀에 바르고 곧게 자리하고 있어야 베를 짤 수 있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성현(聖賢)의 말씀은 사람이 바르게 살아가는 근본적 도리를 말씀한 것이므로 베를 짜는 날실과 같은 것이기에 경()이라 한 것입니다.

()에는 유가(儒家)의 사서오경(四書五經)을 비롯하여 많은 경서가 있고, 불가(佛家)엔 부처님의 말씀을 기록한 수많은 불경(佛經)이 있지요. 또 도가(道家)는 도덕경(道德經)을 비롯한 수많은 경서가 있습니다.

그리고 여기서 경()'날실'이라 하니 이는 베틀의 세로로 곧게 켕긴 실을 말합니다. 날줄이라고도 하지요. 그런데 베를 짤 때는 북에 실을 감아 손으로 좌우로 옮겨가면서 실을 넣습니다. 이를 '씨실'이라 합니다. 가로로 들어간 실을 씨실이라 하고 씨줄이라고도 하지요. 이 씨실을 위()라 합니다. 베는 이 날실과 씨실의 결합으로 베가 완성 됩니다. 여기서 또, ()'세로'를 뜻하고 위()'가로'를 뜻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경도(經度), 위도(緯度)를 말하는데 흔히 동경(東經) 135도 북위(北緯) 38도 운운하기도 하지요.

, 경서(經書)는 성현의 말씀을 기록한 책을 말합니다. 이에 대해 위서(緯書)라는 말도 있습니다. 이는 경서(經書)에 의탁하여 미래의 일이나 길흉화복(吉凶禍福)을 예언한 것을 기록한 문헌을 말합니다.

칠서벽경(漆書壁經)이란 고전자(古篆字)를 옻으로 쓴 벽경(壁經)을 뜻합니다. 알쏭달쏭한 말이 많이 나옵니다.

칠서(漆書)란 무엇일까요? 아주 옛날에는 먹과 붓, 그리고 종이가 없었습니다. 붓을 처음 만든 사람은 전국시대말의 진()나라 장수로 육국(六國)을 통일하는데 공을 세운 몽염(蒙恬)이란 장군이 만들었고, 종이를 처음 만든 사람은 후한 시대 채륜(蔡倫)입니다. 그러니 그 이전에는 글씨를 대나무를 쪼개 만든 죽간(竹簡)에다 썼던 것입니다. 대나무를 쪼개서 일정하게 편편하게 다듬은 다음 이를 가죽으로 엮어서 거기에 글자를 썼던 것입니다. 붓이 없었기에 아직 먹도 나오지 않았습니다. 이때는 옻나무의 진액[漆液]을 채취해 빨대모양의 갈대를 잘라 그 끝에 이 칠액을 묻혀 글씨를 썼던 것입니다. 이것이 칠서(漆書)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글씨를 쓰다 보니 처음은 굵고 끝은 가늘게 쓰여져 모양이 올챙이 모양으로 되었던 것입니다. 글짜 모양이 올챙이[蝌蚪]모양을 닮았다 해서 이를 과두문자(蝌蚪文字)라 합니다. 이는 옻의 끈끈한 성질 때문에 이런 형태의 글자가 된 것입니다.

벽경(壁經)이란 벽()에서 나온 경서(經書)라는 뜻입니다. ()나라 경제(景帝 재위 BC 157~141) , 노공왕(魯恭王)이 공자(孔子)의 사당을 수리하기 위하여 벽을 허물자 벽 속에서 죽간(竹簡)에 고전자(古篆字)를 칠()로 쓴 상서(尙書)46권이 나왔는데 이를 벽경(壁經)이라 합니다. 이 경서는 모두 과두문자((蝌蚪文字)로 쓰여져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 상서를 고문상서(古文尙書라 합니다. 여기에 상서(尙書)》ㆍ《예기(禮記)》ㆍ《논어(論語)》ㆍ《효경(孝經)등 수십 편의 경서(經書)가 나왔던 것입니다. 한나라 때는 예서(隸書)의 시대여서 그때 있었던 상서(尙書)금문상서(今文尙書라 하고 예서(隸書)보다 앞선 시대에 고전자(古篆字)로 쓰였다 해서 고문상서(古文尙書)라 합니다.

그리고 여기서 한 가지 더 살펴보고 갈 것이 있습니다. 어떻게 해서 벽 속에 경서(經書)가 숨겨져 있었을까요? 그 연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간단하게 기술해 보겠습니다.

천하를 통일한 진시황은 군현제 실시, 화폐, 문자, 도량형을 통일하는 등 국가체제를 정비해 갔습니다. 6국이 하나로 통일되었기에 통일된 진나라는 국토가 엄청 넓어졌습니다. 방방곡곡의 물류를 신속하게 이동시키기 위하여 도로를 확장하고 대운하를 건설하였습니다. 또한 천하에 위엄을 드러내기 위하여 아방궁(亞房宮)을 짓고, 북방 흉노족의 침입을 막기 위하여 만리장성(萬里長城)을 축조하기에 이르렀던 것입니다.

이런 사업을 수행하자니 수많은 백성들이 노역에 동원되었고 수많은 사람들이 죽거나 다치게 되었습니다. 이런 현실이고 보니 자연 원성이 터져 나왔고 뜻있는 선비들, 특히 공맹(孔孟)의 가르침을 받드는 유생들은 가혹한 정치를 참다 못해 이를 비판하는 글을 쓰기에 이르렀던 것입니다.

그러자 재상 이사(李斯)는 진시황에게 학자들이란 본디 현실을 모르고 입만 살아서 정부정책을 비방하니 그들을 단속하고 그들이 가지고 있는 시서(詩書)나 제자백가(諸子百家) 따위의 저서는 혹세무민(惑世誣民)하니 모두 몰수하여 불태울 것을 건의했던 것입니다. 또한 진나라 외의 역사는 사관들이 제멋대로 기록했기 때문에 진나라의 역사가 아닌 역사책은 모조리 불태울 것을 건의하자 진시황은 이 말을 옳게 여겨, 진나라 역사책과 의약(醫藥)복술(卜術)농사(農事)에 관한 책외에는 다 불태울 것을 명했던 것입니다.

책이 불타자 유생(儒生)들은 책을 움켜지고 책을 사수하려 혼신을 다했습니다. 그러자 진시황은 분노하여 구덩이를 깊이 파고 유생 460여명을 생매장 했던 것입니다. 이를 저 유명한 분서갱유(焚書坑儒)라 합니다.

이 환란 속에서 공자의 9세손인 공부(孔鮒)는 이 재난을 피하기 위해 여러 서책(書冊)을 벽 속에 감추고 나서 진시황의 부당함을 항거하다가 죽게 됩니다.

세월이 흘러 한나라 경제 때 노공왕(魯恭王)이 공자의 사당의 벽을 헐다가 이때 감추어 두었던 책이 나왔던 것이니 이 책으로 인하여 학계에서는 획기적인 발전을 했던 것입니다.

두고종예(杜槀鍾隸) 칠서벽경(漆書壁經)을 설명하다보니 글이 길어졌습니다. 광내전(廣內殿), 석거각(石渠閣) 등 장서각(藏書閣)에는 삼분오전(三墳五典)의 고대 서적 뿐만 아니라 당시 뛰어난 학자들의 글과 칠서벽경(漆書壁經)이라 일컬어지는 고문상서(古文尙書)등이 망라되어 있다는 이야기이니 고금(古今)의 서적들이 총망라 되어 있음을 보여줍니다.

이는 모두 천하를 다스리는 근본을 밝히고 있는 것이니 인의(仁義)로써 천하를 다스린다면 천하는 편안할 것입니다. 이것으로 제8장 평천하(平天下) 편을 모두 마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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