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起翦頗牧 用軍最精

bindol 2020. 11. 13. 15:56

起翦頗牧 用軍最精

 

本文

起翦頗牧 用軍最精 기전파목 용군최정

白起 王翦 廉頗 李牧 秦名將으로

用兵術이 뛰어나고 가장 精密하였도다.

 

訓音

일어날 기 자를 전 자못 파 기를 목

쓸 용 군사 군 가장 최 찧을 정

 

解說

이번 장에서는 전국시대(戰國時代)의 명장(名將)들을 찬탄하는 내용입니다. 전국시대는 전국칠웅(戰國七雄)이라 해서 칠국(七國)이 할거(割居)하여 약육강식(弱肉强食)하던 시대라 수많은 장군들이 등장합니다. 수많은 전략과 용병을 펼쳐 천하에 용맹을 떨쳐 오늘날에도 그 명성이 이어진 분도 있고 반대인 경우도 있습니다. 수많은 명장들 중 천자문에서는 대표적인 네 명만 들었는데 이들이 어떤 인물인지 알아보고자 합니다.

起翦頗牧(기전파목)

백기(白起) 왕전(王翦) 염파(廉頗) 이목(李牧) ()과 조()의 명장(名將)으로 기()는 주() + ()의 형성자(形聲字), '()''무릎 꿇다'의 뜻입니다. 사람이 조심하여 무릎을 꿇었다 일어섬의 뜻을 나타냅니다. 그래서 '일어서다. 일어나다. 일으키다. 다시'의 뜻으로 쓰입니다. 여기서는 인명(人名)으로, ()나라의 명장 '백기(白起)'를 가리킵니다.

()은 우() + ()의 형성자(形聲字), '()''자를 절()'과 통하여, '자름'의 뜻입니다. '훑다, 자르다'의 뜻을 나타냅니다. 또한 깃을 붙인 화살을 뜻하기도 합니다. 이 글자는 전() 의 본자(本字)이며, '화살 전()'과 동자(同字)입니다. 여기서는 인명(人名)으로, ()나라의 명장인 왕전(王翦)을 말합니다.

()는 혈() + ()의 형성자(形聲字), '()''()'와 통하여 '파도처럼 흔들려 기울다'의 뜻입니다. 머리[]가 기우는 모양[]에서 '치우치다'의 뜻을 나타냅니다. '자못'의 뜻으로 쓰입니다. 여기서는 인명(人名)으로, 전국시대(戰國時代) ()나라의 명장 염파(廉頗)를 뜻합니다.

()은 우() + (=)의 회의자(會意字), '(=)''채찍으로 치다'의 뜻입니다. 소를 채찍으로 치다의 뜻에서 소를 기르는 사람을 뜻합니다. 하여 '기르다', '다스리다', 마소치는 사람', '목장'을 뜻합니다. ()하여, 백성을 기르는 장관(長官)의 뜻으로 쓰입니다. 여기서는 전국시대(戰國時代) ()나라의 명장 이목(李牧)을 뜻합니다.

기전파목(起翦頗牧)은 전국시대(戰國時代)의 네 명의 명장(名將)을 말합니다. 이는 곧 백기(白起), 왕전(王翦), 염파(廉頗), 이목(李牧)을 말합니다. 이들 중 백기(白起)와 왕전(王翦)은 진()나라의 명장이고, 염파(廉頗), 이목(李牧)은 조()나라의 명장입니다. 특히 염파(廉頗)와 이목(李牧)을 일러 파목(頗牧)이라 하는데 명장(名將)이란 대명사로 쓰일 정도입니다.

用軍最精(용군최정)

용병술(用兵術)이 뛰어나고 가장 정밀(精密)하였도다.

()은 상형자(象形字), 용종(甬鐘)이라는 종의 상형(象形)입니다. '종 용()'의 원자(原字)입니다. 이 종의 꼭지를 잡고 들어 올리다의 뜻에서, 파생하여 '끌어 쓰다, 쓰다'의 뜻을 나타냅니다.

()은 차() + ()의 회의자(會意字), '()''둘러싸다'의 뜻이고, ()'전차(戰車)의 뜻입니다. 전차로 포위하는 모양에서, '군사의 집단, 전쟁'의 뜻을 나타냅니다.

()는 모() + ()의 회의자(會意字), '()'는 두건의 형상입니다. 두건을 손끝으로 집어 올리는 모양에서, 손끝으로 쥐다의 뜻을 나타냅니다. '집을 촬()'의 원자(原字)입니다. 손끝으로 집어내다의 뜻에서 파생하여, 다른 것과 구별하여 특별히 문제 삼다, 가장, 특히의 뜻을 나타냅니다.

()은 미() + ()의 형성자(形聲字), '()''맑다'의 뜻입니다. 깨끗하게 대낀 쌀의 뜻이나, '맑은 마음'의 뜻을 나타냅니다. 하여 '찧다, 자세하다, 정성스럽다, 묘하다, 정밀하다' 등의 뜻을 나타냅니다.

용군최정(用軍最精)은 용병술(用兵術)이 뛰어나고 군사(軍事)에 가장 정통(精通)하고 정밀(精密)하였다는 뜻입니다.

전국시대(戰國時代)에는 소위 전국칠웅(戰國七雄)이 할거(割據)하며 어떻게 하면 열강(列强) 속에서 살아남느냐가 관건이었습니다. 강성한 진()나라에 대해서 나머지 육국은 합종(合縱)과 연횡(連橫策)을 오가면서 생존을 건 전쟁이 수도 없이 벌어졌고 수많은 장수와 인물들이 명멸(明滅)했습니다. 열국지(列國志)를 읽어 보면 뛰어난 인물도 많고 명장도 많았습니다. 천자문에서는 수많은 사람을 더 열거할 수 없어 그 중에 뛰어난 명장으로 백기(白起), 왕전(王翦), 염파(廉頗), 이목(李牧) 네 명을 예를 들어 용병술(用兵術)이 뛰어난 이로 지목한 것입니다.

이 인물에 대해서는 사마천(司馬遷)이 쓴 사기(史記)에 자세히 나와 있습니다.

사마천(司馬遷)'남쪽으로 초()의 언()과 영()을 함락하고 북쪽으로 조()의 장평(長平)을 꺾어 한단(邯鄲)을 포위한 것은 무안군 백기(武安君 白起)의 지휘였고, (荊楚)을 무찌르고 조()를 멸망시킨 것은 왕전(王翦)의 모계(謀計)였다. 그래서 백기왕전열전(白起王翦列傳) 第十三을 지었다." 하였습니다.

백기(白起 ? ~ BC 257)는 전국시대(戰國時代) ()나라 미()라는 고을 사람으로 병법(兵法)에 능하여 용병(用兵)이 뛰어나서 진()의 소양왕(昭襄王 재위 B.C 306~251. 진시황의 증조부)에 의해 등용되었습니다. 수많은 전쟁에서 승리하였는데, 남으로는 초()의 언()()한중(漢中)을 평정하고, 북으로 조()나라 장평(長平)에서 조괄(趙括)이 이끄는 조군(趙軍)과 교전하여 조나라의 장수 조괄은 물론 군사들을 궤멸시켰고 항복한 조나라 포로 40만명을 후환을 없애기 위해 구덩이를 파고 모두 학살하여 제거해 버렸습니다. 그는 언제나 싸우면 이기고 공격하면 반드시 점령하기 때문에 그의 이름만 들어도 적군들은 겁을 먹고 떨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참혹한 죽음에 인과(因果)가 없을 수 없었으니, 백기의 공적을 시기한 승상 범저(范雎)와 불화하게 되었는데, 범저는 백기를 소양왕에게 교묘하게 참소하였고, 그의 참소를 들은 소양왕은 칼을 보내 무안군(武安君) 백기에게 자결을 명하였습니다. 그는 칼을 받아들고, 길이 한탄했습니다. "내가 하늘에 무슨 죄를 지었기에 이 지경이 되었는고!" 그러다가 다시 탄식했습니다.

"그렇지! 이제 마땅히 죽어야지! 지난번 장평 땅에서 항복한 조나라 군사를 속여 하룻밤 사이에 40여만 명을 죽인 나 아닌가! 그들에게 무슨 죄가 있으리오! . 이젠 내가 죽어야지! 죽어야 마땅하지!"

말을 마친 백기는 칼로 자기 목을 지르고 죽었으니 이때가 진소양왕 50(BC257)이었습니다. 진나라 사람들은 억울하게 죽은 백기를 동정하고 슬퍼하며 곳곳에 사당을 지어 기렸습니다.

그 후 대당(大唐) 말년 때의 일입니다. 갑자기 하늘에서 뇌성이 일어나더니 들에 있던 소 한 마리가 벼락을 맞고 나자빠져 죽었다고 합니다. 사람들이 죽은 소를 살펴보니 뱃가죽에 '백기(白起)라는 두 글자가 씌어 있었다고 합니다.

그 죽은 소를 보고 어떤 사람이 다음과 같이 평했다고 합니다.

옛날에 무안군 백기 장군은 많은 사람을 죽였기 때문에 수백년이 지난 오늘날에 와서 짐승의 몸을 받아 벼락을 맞고 응보(應報)를 받은 것이다. 대저 살생(殺生)의 죄는 이렇듯 중한 법이다.

왕전(王翦 ? ~?)은 전국시대(戰國時代) ()나라 빈양(頻陽)의 동향(東鄕)사람으로, 어려서부터 병법을 좋아하다가 진시황(秦始皇)을 섬기게 되었습니다. 진시황 11(B.C 236), 왕전은 장군으로서 조()나라 알여(閼與)를 쳐서 조군(趙軍)을 격파하고, 9개의 성()을 손을 넣었고, 18년에도 조나라를 쳐, 1년여에 걸친 싸움 끝에 조왕(趙王)의 항복을 받고, 그 영토를 모두 진나라 군()에 편성시켰습니다.

그 이듬해 연()나라가 형가(荊軻)를 보내 시황(始皇)을 찔러 죽이려던 사건이 일어났는데, 이에 시황은 왕전에게 연나라를 정벌하게 했습니다. 연왕(燕王)은 요동(遼東)으로 달아났고, 왕전은 그 도성인 계()를 평정하고 귀국했습니다. 시황은 또 왕분(王賁 왕전의 아들)에게 초()나라를 치도록했는데 왕분은 초군(楚軍)을 격멸하고, 그 여세로 위()나라를 쳐 위왕(魏王)의 항복을 받아 그 땅을 평정했습니다.

그런데 진나라 장군 중에는 이신(李信)이라는 자가 있었는데 연소하지만 용맹을 자랑했습니다. 이때 이신은 진시황의 신임을 얻은 바 있었는데, 어느 날 시황이 그에게 의견을 물었습니다.

"내 장차 초나라를 치려하는데, 장군의 생각으로는 몇 명의 군사가 있으면 될 것 같은가?"

"20만이면 넉넉할 줄 압니다."

시황은 같은 것을 다시 왕전에게 물었습니다. 그러자 왕전은

"60만이 아니고서는 아니 될 줄 아옵니다." 하고 아뢰었다.

그러자 시황은 말했습니다.

"왕장군은 늙었다. 왜 그리도 겁이 많은가? 이장군은 과연 그 기세가 용맹하다. 그 말이 옳다."

그리하여 이신(李信)과 몽무(蒙武)에게 명해서 20만을 이끌고 남쪽의 형(. )나라를 치게 하였습니다. 이에 왕전은 자기의 의견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칭병(稱病)하고는 빈양(頻陽) 땅에서 여생을 보내게 되었습니다.

이신과 몽무은 처음에 대승을 거두는 듯했으나 항연(項燕)이 이끄는 초군(楚軍)의 기

 

습을 받아 대패하고 말았습니다. 이에 시황은 대노하고 빈양의 왕전을 찾아가 잘못을 사과하고 60만대군을 주어 초를 치게 하니, 왕전은 마침내 B.C 223년 대승을 거두고 초나라를 멸국(滅國)하여 초군(楚郡)을 설치하고 개선하게 됩니다. 개선 후 왕전은 정치에 욕심을 내지 않고 진왕으로부터 많은 전답과 저택을 하사받아 명철보신(明哲保身)하면서 안락하고 평온한 여생을 보냈다고 합니다.

염파(廉頗 ?~?)는 전국시대(戰國時代) ()나라의 명장(名將)입니다. ()나라 혜문왕(惠文王 B.C 298 ~ 266) 16, 염파는 제()나라를 쳐서 크게 깨뜨리고, 양진(陽晉 山東省)을 취했으므로 상경(上卿)에 올랐고, 이로써 그의 용맹은 제후들에게 널리 알려졌습니다.

그는 인상여(藺相如)와 문경지교(刎頸之交)를 맺었는데 그로 인해 진()나라가 감히 넘보지 못했다고 합니다.

인상여(藺相如)와 관련해서는 천자문 金生麗水 玉出崑岡을 공부하면서 화씨벽(和氏璧)에 대한 유래와 얽힌 이야기를 풀면서 거론한 바 있습니다. 바로 이 시대의 이야기였습니다. 그 이야기는 길어서 다시 여기서 할 수는 없으니 2장 지덕편(地德)』「1. 金生麗水 玉出崑岡편을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재미있는 이야깁니다.

염파(廉頗)와 인상여(藺相如)에 대해서는 <문경지교(刎頸之交)>라는 고사(故事)가 있습니다. 문경지교(刎頸之交)란 생사를 함께할 만큼 절친한 사김이나 그런 벗을 말합니다.

옛날 초()나라의 변화(卞和)가 발견한 옥돌을 가공하여 화씨벽(和氏璧)이라 불렀는데, 그 화씨벽이 조나라의 혜문왕(惠文王)의 수중에 들어갔습니다. 이 사실을 안 진()의 소양왕(昭襄王)이 이를 탐내 진의 15개성()과 바꾸자고 제안했습니다. 이에 조나라는 전전긍긍하게 되었습니다. 이에 응하지 않으면 조나라가 강성한 진나라에 의해 결딴이 날 판국이고 주자니 너무 아까운 보배였던 것입니다. 이때 인상여가 나서서 화씨벽을 들어 진왕에게 바치고 기지로써 해결한 바 있습니다.

이 공으로 인상여는 상대부(上大夫)가 되었습니다. 그 뒤 진나라는 조나라를 쳐서 석성(石城)을 함락시켰고, 그 이듬해 다시 조나라를 쳐 2만 명을 죽였습니다. 그리고서는 진왕이 회합을 도모하자며 조왕과 만나자고 하니 조왕은 겁을 먹었는데, 안 가면 겁쟁이가 되니 가시는게 좋겠다는 염파와 인상여의 건의에 따라 가기를 결심하고 인상여와 함께 진왕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염파는 국경에 군대를 배치하여 만약의 사태를 대비하였습니다. 인상여가 진왕과의 면담에서 조왕의 권위를 세워주고 돌아오자 조왕은 그 공을 높이 사 인상여를 상경(上卿)으로 임명했습니다.

그러자 염파는 불쾌해졌습니다. 인상여가 자신보다 높은 자리에 앉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나는 조나라 장군으로 전쟁에 큰 공이 있었다. 인상여는 겨우 입과 혀끝을 놀렸을 뿐인데 지위는 나보다 높다. 게다가 상여는 본래 천한 출신이다. 나는 부끄러워서 도저히 그의 밑에 있을 수 없다."

염파는 상여를 만나면 모욕을 주어야겠다고 별렀는데, 이를 안 인상여는 되도록 염파를 만나지 않으려 피하였습니다. 인상여는 외출을 할 때 염파가 오는 것을 보면 수레를 끌고 피해 숨곤했는데, 이에 사인(舍人)들은 불평을 했습니다.

"우리들이 고향을 떠나 상공을 모신 것은 오직 상공의 높은 의기를 흠모하기 때문입니다. 지금 상공께선 염장군과 서열을 같이 하십니다. 그런데 염장군이 상공에 대해 욕을 하는데도 상공께선 그가 두려워서 피해 숨으시며, 이상할 정도로 무서워하십니다. 이것은 못난 사람들도 부끄러워 할 일입니다. 더구나 장군이나 대신으로서야 말할 것도 없습니다. 저희들은 못된 인간들이라 물러갈까 합니다."

그러나 인상여는 굳이 그들을 붙들며 말했습니다.

"여러분은 염()장군과 진왕(秦王) 중 누가 더 무섭다고 생각하오?"

"진왕을 당할 수가 없지요."

"그런 진왕의 위엄을 상대로 하여, 나는 조정에서 그를 꾸짖고 그 신하들을 욕되게 했소. 내가 아무리 노둔하기로 염장군을 무서워할 리가 있겠소? 다만 살펴보건대 강한 진나라가 감히 조나라를 공격하지 못하는 것은 오직 우리 둘이 있기 때문이오.

만일 지금 우리 두 호랑이가 싸우면, 형세로 보아 둘 다 무사할 수 없는 일이오.

내가 염장군을 피하는 것은 나라의 급한 것을 먼저하고 사사로운 원수를 뒤로 돌리기 때문이오."

이 말을 전해들은 염파는 웃옷을 벗고, 가시 채찍을 등에 지고, 인상여의 집 문 앞에서 사죄했다.

"더럽고 천박한 인간이 장군께서 이토록 너그러우신 줄을 미처 몰랐소."

이리하여 두 사람은 마침내 화해하고 생사를 같이 하자는 문경지교(刎頸之交)를 맺었던 것입니다.

이 해, 염파는 동쪽으로 제()나라를 쳐서 그 일군(一軍)을 무찌르고, 2년 뒤, 제나라의 기()를 쳐 함락시키고, 3년 뒤에는 위()나라 방릉(防陵)과 안양(安陽)을 쳐서 함락시켰습니다. 4년 뒤 인상여는 장군으로서 제나라를 쳐서 평읍(平邑)까지 쳐들어갔다가 철수하였고, 그 이듬해 조사(趙奢)는 진나라 군사와 알여(閼與)부근에서 싸워 이겼습니다.

혜문왕이 죽고 아들 효성왕(孝成王 B.C 265~245)이 즉위했는데, 효성왕 7, 진나라는 다시 조나라의 장평(長平)에서 맞섰습니다. 그때 조사(趙奢)는 이미 죽고, 인상여는 병이 깊어 염파를 장군에 임명하여 진나라와 맞서게 했습니다. 그러나 조군(趙軍)이 진군(秦軍)에게 자주 패하자 조군은 방벽을 굳게 지킬 뿐 싸우려 하지 않았습니다.

이에 진군이 여러 차례 도전했지만 염파는 끝내 응전하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진나라에서는 첩자를 이용하여 다음과 같이 선전하였습니다.

"진나라가 걱정하는 것은, 마복군(馬服君) 조사(趙奢)의 아들 조괄(趙括)이 장군이 되는 것이다. 그 외에는 아무것도 걱정할 것이 없다."

조왕(趙王)이 이 선전을 믿고서 조괄(趙括)을 장군으로 임명하여 염파에 대신하려 했습니다. 인상여가 반대했지만 조왕은 듣지 않았습니다.

조괄이 염파를 대신하자, 조괄은 군령을 모조리 뜯어 고치고, 군리(軍吏)들을 모두 교체해 버렸습니다.

진나라 장수 백기(白起)는 그 소식을 듣자, 기병(騎兵)을 보내 거짓 달아나는 시늉을 보이고, 조나라 군사의 보급로를 끊은 다음, 조나라의 군사를 두 도막으로 갈라놓았습니다. 조나라의 군사들은 조괄로부터 마음이 이탈되었고, 40여일이 지나자, 조군은 굶주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조괄은 마침대 정예군을 이끌고 백병전에 가담했습니다. 그러자 진나라 군사가 조괄을 쏘아 죽였습니다. 조괄의 군대는 대패하여 수십만이 진나라에 항복했습니다. 그리고 진나라는 항복한 그들을 모조리 구덩이에 처넣어 죽였던 것입니다. 조나라는 전후 싸움에서 약 45만 명이 죽었다고 합니다.

이듬해 진나라 군사는 마침내 조나라 수도 한단((邯鄲)을 포위하여 함락될 지경에서 가까스로 초()나라)와 위()나라의 구원으로 포위를 풀 수 있었습니다.

포위가 풀린 지 5년 후 이번에는 연()나라가 쳐들어 왔습니다. 이에 염파를 장군으로 임명하여 막게 하니 염파는 적장을 죽이고 연나라 서울을 포위하기에 이릅니다. 이에 연나라는 5개 성을 내주고 화평을 청하게 됩니다. 이 공로로 염파는 신평군(信平君)이란 작호를 받았고 임시로 상국(相國)에 임명되었습니다.

6년 후, 염파는 위()나라 번양(繁陽)을 쳐 함락시켰습니다. 효성왕이 죽자 그의 아들 도양왕(悼襄王 B.C 244~236)이 즉위하였는데, 왕은 염파를 해임하고 악승(樂乘)을 장군에 임명하니 염파가 격노하여 악승을 공격했고, 악승은 패하여 도망치고 염파도 마침내는 위()나라 대량(大梁 위나라 수도)으로 달아났습니다. 이듬해 조나라는 이목(李牧)을 장군으로 임명하고, ()나라를 쳐서 무수(武遂)와 방성(方城)을 함락시켰습니다.

염파가 오랫동안 대량에 머물렀으나 위나라는 그를 등용하지 않았는데, 그 동안 조나라는 진나라에 시달렸으므로 염파를 다시 쓸 생각을 하였고, 염파도 조나라에서 일하고 싶었습니다. 조왕은 사자를 보내 염파가 과연 장군으로서 임무를 감당할 수 있는지 알아보게 했습니다.

그러자 염파와 원수지간인 곽개(郭開)가 사자에게 많은 돈을 주어 염파를 중상하도록 시켰습니다. 사자가 염파를 만나자, 염파는 한 말의 밥과 열 근의 고기를 먹어 보인 다음, 갑옷과 투구를 쓰고 말에 뛰어올라, 건재함을 보여 주었습니다. 하지만 사자는 돌아와 이렇게 보고 했습니다.

"염장군은 늙었는데도 아직 식성이 좋았습니다.

그러나 신과 자리를 같이하는 동안, 자주 똥을 싸곤 했습니다."

조왕은 염파를 늙은 것으로 판단하고 결국은 부르지 않았습니다.

이목(李牧 ?~?)은 조()나라의 명장(名將) 중의 명장이자 동량지신(棟樑之臣)이었습니다. 그는 북변(北邊)의 명장으로 흉노(匈奴)를 정벌하여 혁혁한 공을 세웠습니다.

B.C 243년에 연()나라와의 싸움에서 대승을 거둬 무수(武遂), 방성(方城) 땅을 함락하고, B.C 233년에는 진()나라 군사들을 적여(赤麗), 의안(宜安)에서 대파했으며, B.C 232년에도 역시 진군(秦軍)을 업()과 번오(番吾)에서 대패시켰던 것입니다. 이런 공로로 이목은 무안군(武安君)에 봉해졌습니다.

B.C 229년에는 노장 왕전(王翦)이 이끄는 진의 대군이 한단(邯鄲)으로 총출동하는 초비상 사태 하에서 진()나라 군사를 대패시켜 멸망의 위기를 극복하는 등 열거하기 힘들 정도로 수많은 전공(戰功)을 세워 나라를 위기에서 구출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목이 있는 한 조나라를 패배시키기 힘들 것이란 판단을 한 진()이 조나라의 조왕(趙王)이 총애하는 간신 곽개(郭開)를 매수하여 그에 대한 이간계(離間計)를 쓰기에 이르렀습니다. 진나라는 곽개(郭開)에게 많은 돈을 주어 포섭한 다음 이목과 사마상(司馬尙)이 반란을 꾀한다는 말을 퍼뜨리게 했습니다. 그리하여 조왕은 조총(趙葱)과 제나라 장군 안취(顔聚)를 보내, 이목을 대신하게 했는데, 이목이 그 명령에 따르지 않았습니다.

"조총은 대장이 될 만한 자격이 없소. 내 어찌 그런 자에게 대장의 인()을 넘겨줄 수 있으리오."

그날 밤 조나라 대장 이목은 장막 안에 대장의 인을 걸어 둔 뒤 미복(微服)으로 갈아입고 위()나라를 향해 달아났습니다. 조총은 곽개에게 감사를 표하고 이목을 게 여겨 역사(力士)를 풀어 이목을 잡으려 했고, 마침내 위나라로 가는 길목에서 이목을 발견하고 나그네로 가장한 역사들이 술을 권한 다음 술에 취해 쓰러지자 한칼에 목을 끊어 버렸으니 참으로 슬프고 애달픈 일이었습니다. 명장 중의 명장인 이목도 곽개 때문에 살해되고 말았으니 참으로 원통한 일이었습니다.

아무튼 이목이 없는 조나라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이목이 사라진 석 달 뒤인, B.C 228, 진나라의 왕전(王翦)은 조()나라를 대대적으로 침공하여 조군을 대파하여 이목을 대신한 조총(趙葱)을 죽이고 안취(顔聚)를 사로잡았으며, 조왕(趙王) ()을 사로잡았으니 결국 조나라는 멸망하고 말았습니다. 천하의 명장이지만 비운의 장군이 된 이목(李牧)입니다.

기전파목 용군최정(起翦頗牧 用軍最精)은 전국시대(戰國時代)의 네 명의 명장(名將)인 백기(白起), 왕전(王翦), 염파(廉頗), 이목(李牧)은 군사(軍事)에 가장 정통(精通)하고 정밀(精密)했음을 찬탄한 내용입니다.

이들은 군사에 정통하여 용병술이 뛰어나 그 공이 혁혁했지만 왕전을 빼놓고는 비운에 가고 말았습니다. 이에는 동량지신을 모략한 간계(奸計)에 넘어간 왕의 어리석음도 있었고, 국익보다는 사리사욕에 눈먼 용렬한 자의 비열함이 있었던 것입니다. 또한 이미 공이 높고 천하에 이름을 떨쳤음에도 아상(我相)이 높아 화를 자초한 면도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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