九州禹跡 百郡秦幷
【本文】
九州禹跡 百郡秦幷 구주우적 백군진병
九州는 禹임금이 全域 나눈 자취이고
百郡은 秦始皇이 幷合한 후 나누었다.
【訓音】
九 아홉 구 州 고을 주 禹 우임금 우 跡 자취 적
百 일백 백 郡 고을 군 秦 진나라 진 幷 어우를 병
【解說】
지난 장에서는 구주우적(九州禹跡)에 대하여 자세히 알아본 바 있습니다. 고대(古代)에 나라를 경영함에 있어 우(禹)임금이 치수(治水)에 성공한 뒤에 구주(九州)를 나눈 업적을 공부했습니다. 이번 장에서는 진시황(秦始皇)이 군웅할거(群雄割據)하던 전국(戰國)을 통일한 후 봉건제(封建制)에서 군현제(郡縣制)로 개편한 사실을 적시한 백군진병(百郡秦幷)에 대하여 공부해 보고자 합니다.
백군진병(百郡秦幷)
백군(百郡)은 진시황(秦始皇)이 병합(幷合)한 후 나누었다.
백(百)은 일(一) + 백(白)의 형성자(形聲字)로, '백(白)'은 '박(博)'과 통하여, '넓다'의 뜻을 나타냅니다. '넓다'의 뜻에서 큰 수로서의 '일백'의 뜻도 나타냅니다. 또, 일(一) + 백(白)의 회의자(會意字)로, 일(一) 에서 백(白)에 이르면 명백해져서 다시 처음으로 돌아오므로 일(一)과 백(白)을 합하여 그 뜻을 표시하는 것으로 보기도 합니다. '일백, 다수, 모든'의 뜻을 나타냅니다.
군(郡)은 읍(邑) + 군(君)의 형성자(形聲字)로, '군(君)'은 '군(群)'과 통하여 무리의 뜻입니다. 마을의 무리, 행정 단위의 하나를 나타냅니다. 행정 단위인 '군(郡)'을 나타냅니다.
주(周)나라에서는 현(縣) 아래에 속하였다가, 진(秦)나라에 이르러 천하를 36군(郡)으로 나누었을 때 현(縣)은 그 아래에 속하게 하였고, 한(漢)나라 무제(武帝)에 이르러서는 천하를 13주(州)로 나누어 군(郡)은 주(州)에 속하였으며, 당(唐)나라 때에는 주(州)를 폐하여 도(道)를 설치하고 군(郡)을 주(州)로 개칭한 이래, 송원(宋元)을 거쳐 군(郡)의 칭호는 없어졌습니다.
진(秦)은 화(禾) + 용(舂)의 회의자(會意字)로, '용(舂)'은 절구 위로 양손으로 치켜드는 절굿공이의 상형(象形)이고, 화(禾)는 갑골문(甲骨文)과 금문(金文)에서는 양화(兩禾)의 형태로, 벼가 위로 뻗어 우거지다의 뜻을 나타냅니다. '진(蓁)'ㆍ'진(榛)'의 원자(原字)로, 뒤에 나라이름으로 쓰였습니다. 또, 화(禾) + 용(舂)의 회의자(會意字)로, '용(舂)'은 '방아 찧다'의 뜻이고, '화(禾)'는 '벼'를 뜻합니다. 합하여 백익(伯益)의 자손의 봉지(封地)인 감숙성(甘肅省) 진주(秦州) 땅을 나타냅니다. 그 땅은 벼농사에 알맞았기 때문입니다. 주대(周代)에 제후 비자(非子)가 진읍(秦邑)에 봉해져 진(秦)나라가 일어나게 되었으므로 '진(秦)나라'로 쓰이게 되었습니다. 일설에는 진(秦)이란 '벼 이름'이라고도 합니다.
병(幷)은 상형자(象形字)로, 사람을 늘어세워 연결한 모양을 따서, '합치다'의 뜻을 나타냅니다. 또는 종(从) + 견(幵)의 회의자(會意字)로 보아, 두 사람[从]이 각각 방패[干]를 들고 서로 나란히 따름을 나타냅니다. 그래서 '아우르다, 합치다, 어울리다, 함께 하다'의 뜻을 나타냅니다.
백군진병(百郡秦幷)은 진(秦)나라의 시황제(始皇帝)는 육국(六國)을 병합(幷合)한 후 천하를 백군(百郡)으로 나누었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육국(六國)은 한(韓)ㆍ위(魏)ㆍ조(趙)ㆍ제(齊)ㆍ초(楚)ㆍ연(燕) 등 여섯 나라를 말합니다. 이 여섯 나라는 전국시대에 있어 진(秦)을 포함하여 전국칠웅(戰國七雄)이라 했지요. 진시황은 이들을 차례로 각개격파(各個擊破)하여 사상 최초로 대륙을 통일하는 대업을 이루었던 것입니다.
육국을 차례로 멸하여 통일대업을 이루자 영민한 진왕(秦王)은 자신의 공업(功業)이 고대 삼황오제(三皇五帝)가 이룩한 업적과 견줄만하다 하여 삼황(三皇)의 황(皇)과 오제(五帝)의 제(帝)를 취하여 황제(皇帝)라 하고 이는 처음 황제를 칭하는 것이므로 시황제(始皇帝)라 칭하게 했던 것입니다.
시황제는 통일진국을 어떻게 통치할 것인가에 대하여 신하들의 의견을 들었는데 승상을 비롯한 대부분의 신하들은 주(周)나라가 그랬던 것처럼 봉건제도(封建制度)를 그대로 쓰자는 의견이었습니다.
"지난날의 연(燕)나라와 제(齊)나라와 초(楚)나라와 조(趙)나라 땅은 너무나 크고 우리 함양성(咸陽城)에서 너무 먼 거리에 있습니다. 그런 멀고도 큰 땅엔 왕을 두고 각 지방을 통치해야만 이 무한한 천하를 다스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사(李斯)는 에에 강력한 반대 의견을 피력했습니다.
"옛날에 주(周)나라는 신하들에게 수백 개의 나라를 봉(封)해 주었습니다. 그 당시에 나라를 받은 신하들이란 거개가 다 주왕실과 동성(同姓)인 희씨(姬氏)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결과가 어찌 되었습니까? 그들의 자손들은 서로 자기 나라 땅을 넓히기 위해 주왕실은 돕지도 않고 서로 저희들끼리 다투고 싸우기에 여념이 없었습니다. 이제 폐하는 천하를 통일하셨습니다. 그런데 또 옛 주나라의 폐단을 이어받으시렵니까? 폐하께서는 천하를 군(郡)과 현(縣)으로 나누시고 강력한 중앙 집권으로써 세상을 다스려야 합니다. 곧 아무리 공로가 큰 신하들에게도 녹봉(祿封)을 많이 줄지언정 한 치의 땅도 줘선 안 되며, 그 누구에게도 특권을 줘서는 안 됩니다. 그래야만 모든 전쟁과 불행이 없어지며, 따라서 영원한 평화와 진나라의 번영을 기할 수 있습니다."
이 말을 들은 진시황은 이를 옳게 여기어 이사의 의견을 채용하였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봉건제(封建制)를 폐지하고 군현제(郡縣制)를 실시하였으니, 천하를 36군(郡)으로 나누고 1,400여 개의 현(縣)으로 편성하고 각지에 군태수(郡太守)와 현령(縣令)을 파견하여 강력한 중앙집권체제를 추진하였던 것입니다. 이 사실을 일러 백군진병(百郡秦幷)이라 한 것입니다.
여기서 백군(百郡)은 꼭 백이라기 보다는 천하를 많은 군현(郡縣)으로 나누었다는 의미입니다. 후에 한(漢)나라 때는 103군(郡)을 두기도 했습니다.
진시황제(秦始皇帝)
이왕 진시황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으니 진시황은 누구인가 간략히 알아보고자 합니다.
진시황(秦始皇(재위 B.C 246~B.C 210)은 진(秦)나라의 36대 군주로, 장양왕(莊襄王 재위 B.C 249~B.C 247)의 아들이며 진나라를 강성하게 만든 33대 왕인 소양왕(昭襄王 재위B.C 306~B.C 251)의 증손자입니다.
성(姓)은 영(嬴)이고 이름은 정(政)으로, 부왕인 장양왕의 뒤를 이어 열 세살의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올랐습니다. 그런데 부친은 소양왕의 손자로, 청년시절 조(趙)나라에 볼모로 잡혀와 있었습니다. 당시 그는 소양왕의 손자이긴 했으나 왕위 계승과는 전혀 거리가 먼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이름이 이인(異人 후에 子楚로 개명함)인데 조나라의 수도 한단에서 볼모생활을 하였습니다. 현왕인 소양왕(昭襄王)이 죽으면 태자인 안국군(安國君)이 왕위를 계승하게 되는데, 태자에게는 여러 여자의 몸에서 난 아들이 스물세 명이나 있었습니다. 이인은 이 중에 한 명이었습니다. 그런데 태자비에겐 아들이 없어 많은 서자들 중 누가 왕통을 이을 지는 미정이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이인의 생모는 이인을 낳은 후 태자에게 미움을 사서 대궐 밖으로 추방을 당한 상태였고, 이인은 조나라에 볼모신세였으니 그가 나중에 왕위에 오를 가능성은 제로에 가까웠습니다.
그런데 그의 운명은 한나라의 거상(巨商) 여불위(呂不韋)를 만나면서 바뀌게 됩니다. 상업적 수단이 좋은 여불위는 별 볼일 없는 일개의 공자를 왕으로 만들기 위해 공작을 펼치게 됩니다. 그는 우선 미색이 뛰어난 애첩 주희(朱姬)를 공자에게 내어주어 아내가 되게 하였는데 그 사이에서 난 아들이 영정(嬴政)으로 바로 저 유명한 진시황인 것입니다.
그래서 훗날 진시황은 여불위의 자식이다 아니다 하는 논란이 있었습니다.
여불위는 모든 방법과 수단을 동원하여 일개 잊혀졌던 공자를 안국군(安國君)의 후계자로 만들었으니 얼마나 수완이 탁월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그는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든 장본인이었습니다. 소양왕이 죽자 안국군이 왕위를 이어 효문왕(孝文王)이 되었으나 곧 서거하고 그 뒤를 장양왕이 왕위를 이었으나 왕위에 오른 지 4년이 되던 해에 돌연 세상을 떠나니 어린 정(政)이 열셋의 나이에 왕위에 올랐던 것입니다.
어린 진왕 정(政)은 즉위 초 승상 여불위의 보필을 받았으나 장성하면서 점차 강력한 통치력을 발휘했습니다. 그는 노애(嫪毐)의 반란을 평정한 후 오늘의 자신 을 있게 하여 중보(仲父)라는 최고의 존칭을 바쳤던 여불위도 제거하기에 이릅니다. 그런 후 울료(尉繚)와 이사(李斯) 등을 등용하여 강력한 부국강병책을 추진하게 됩니다.
문무 관료들을 적재적소에 등용하여 한(韓)ㆍ위(魏)ㆍ초(楚)ㆍ연(燕)ㆍ조(趙)ㆍ제(齊) 육국(六國)을 차례로 각개격파(各個擊破)하여 마침내 B.C 221년에 천하통일의 위업을 달성했던 것입니다. 왕위에 등극한 지 26년, 그의 나이 39세였습니다.
통일을 이룬 직후 자신의 공업(功業)을 삼황오제(三皇五帝)의 업적에 견주면서 왕호를 버리고 새로이 황제(皇帝)라 칭하게 하고 스스로를 시황제(始皇帝)라 하였습니다.
그는 봉건제(封建制)를 폐지하고 군현제(郡縣制)를 실시하여 강력한 중앙집권을 꾀하였고, 법령을 정비하였으며, 나라마다 다른 서체(書體)를 통일하고, 도량형(度量衡)과 화폐를 통일하였습니다. 또한 국토가 커졌기에 방방곡곡의 물류를 신속하게 이동시키기 위하여 도로를 확장하고 대운하를 건설하였습니다. 국론 분열을 방지하기 위하여 법가(法家)를 중심으로 한 사상의 통일을 실시하였습니다.
또한 천하에 위엄을 드러내기 위하여 여산릉((驪山陵)과 아방궁(亞房宮)을 짓고, 북방 흉노족(匈奴族)의 침입을 막기 위하여 만리장성(萬里長城)을 축조하기에 이르렀던 것입니다. 이런 사업을 수행하자니 수많은 백성들이 노역에 동원되었고 수많은 사람들이 죽거나 다치게 되었습니다. 이런 현실이고 보니 자연 원성이 터져 나왔고 뜻있는 선비들, 특히 공맹(孔孟)의 가르침을 받드는 유생들은 가혹한 정치를 참다 못해 이를 비판하는 글을 쓰기에 이르렀던 것입니다.
그러자 재상 이사(李斯)는 진시황에게 학자들이란 본디 현실을 모르고 입만 살아서 정
부정책을 비방하니 그들을 단속하고 그들이 가지고 있는 시서(詩書)나 제자백가(諸子百家) 따위의 저서는 혹세무민(惑世誣民)하니 모두 몰수하여 불태울 것을 건의했던 것입니다. 또한 진나라 외의 역사는 사관들이 제멋대로 기록했기 때문에 진나라의 역사가 아닌 역사책은 모조리 불태울 것을 건의하자 진시황은 이 말을 옳게 여겨, 진나라 역사책과 의약(醫藥)ㆍ복술(卜術)ㆍ농사(農事)에 관한 책 외에는 다 불태울 것을 명했던 것입니다. 이런 과정에서 분서갱유(焚書坑儒) 사건이 일어났던 것입니다.
만년에는 자신이 이룩한 통일제국이 만세(萬歲)까지 유지되기를 기원하여 신선술(神仙術)과 불로장생술(不老長生術)에 심취하여 불로영약(不老靈藥)을 구하여 불로장생(不老長生)을 꾀하였으나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그 후 자신이 이룩한 위대한 땅을 밟아보고자 지방을 순수(巡狩)하던 중 병을 얻어 운명하고 말았으니 그의 춘추 향년 50세였습니다.
왕위에 오른지 37년이요 천하를 통일한 지 12년 되던 해였습니다. 이때가 B.C 210년이었습니다.
진시황 사후 환관 조고(趙高)의 농간으로 위대한 통일제국은 멸망의 길을 걷게 되었습니다. 진시황은 장자 부소(扶蘇)로 하여금 보위를 이여 2세황제가 되도록 유언했는데 조고(趙高)와 이사(李斯)가 짜고 거짓 조서를 꾸며 되레 부소와 장군 몽염(蒙恬)을 죽게 하고 시황제의 아들딸 22명을 처형시키고 어리석은 막내 호해(胡亥)를 2세 황제에 옹립하였으니 이때부터 통일제국은 암운(暗雲)이 드리워지고 세상은 환관 조고가 주무르게 되었습니다. 조고는 지록위마(指鹿爲馬)의 주인공이지요. 환관 조고는 이사도 처형하고 말았으니 천하는 다시 혼란으로 요동치고 곳곳에서 반란이 일어나니 조고는 2세황제도 제거하고 부소의 장자 자영(子嬰)을 3세황제로 옹립했으나 도리어 자영에게 죽임을 당하였고 자영은 재위 43일 만에 유방(劉邦)에게 항복하여 멸망하고 말았으니 통일제국(統一帝國)은 겨우 3대 16년 만에 멸망하고 말았습니다. B.C 206년의 일입니다.
이상 진시황에 대하여 간략히 정리하였습니다.
구주우적 백군진병(九州禹跡 百郡秦幷)을 통하여 홍수를 다스리고 천하를 구주(九州)로 나눈 우(禹)임금의 업적과 봉건제를 폐지하고 군현제를 실시한 진시황제를 보면서 중국대륙을 어떻게 경영하여 왔나 살필 수 있었습니다. 이를 통하여 민생을 안정시키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한 일이 아닌가 생각해 보았습니다. 이번 장을 끝으로 왕후장상(王侯將相) 편 은 막을 내리고 다음부터는 명산대천(名山大川) 편을 공부하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