千字文 工夫

雁門紫塞 鷄田赤城

bindol 2020. 11. 14. 05:35

雁門紫塞 鷄田赤城

 


【本文】

雁門紫塞 鷄田赤城 안문자새 계전적성

높고 험한 雁門關엔 萬里長城 紫塞 있고

아득한 鷄田과 赤城이란 곳도 있다.

【訓音】

雁 기러기 안 門 문 문 紫 붉을 자 塞 변방 새

鷄 닭 계 田 밭 전 赤 붉을 적 城 재 성

 


【解說】

계전적성(鷄田赤城) 아득한 계전(鷄田)과 적성(赤城)이란 곳도 있다.

계(鷄)는 조(鳥) + 혜(奚)의 형성자(形聲字)로, '혜(奚)'는 '매다'의 뜻입니다. 가축으로서 매어 두는 새, '닭'의 뜻을 나타냅니다. 계지시축(鷄知時畜)이라 했으니, 닭은 때를 알리는 집짐승이라 했습니다. '계(鷄)'의 본자(本字)는 '계(雞)'입니다.

전(田)은 상형자(象形字)로, 구획된 사냥터나 경작지의 상형(象形)으로, '사냥, 논밭'의 뜻을 나타냅니다. 또, 구(口)와 십(十)의 회의자(會意字)로 보아, '구(口)'는 '사방의 토지', '십(十)'은 '동서남북으로 통하는 길'을 나타낸 것으로 보기도 합니다.

적(赤)은 대(大) + 화(火)의 회의자(會意字)입니다. '대(大)'는 사람을 본뜬 모양으로, 불빛을 받는 사람의 모양으로서, '붉다, 빨갛다'의 뜻을 나타냅니다. 또, 큰불이나 태양의 붉은 빛을 뜻하기도 합니다.

성(城)은 토(土) + 성(成)의 형성자(形聲字)로, '성(成)'은 '안정하다'의 뜻입니다.

금문(金文)과 주문(籒文)에서의 '토(土)는 망루의 상형(象形)입니다. 망루가 있고, 흙을 쌓아 올려 담을 이루며 사람을 들여 놓아 살게 하여 안정시키는 '성'의 뜻을 나타냅니다. 또, 토(土) + 성(成)의 회의ㆍ형성자(會意 形聲字)로 보아, 마을을 빙 둘러친 흙으로 쌓은 담이 '성'이라는 뜻으로 만든 글자라고도 합니다.

계전적성(鷄田赤城)은 계전(鷄田)과 적성(赤城)이란 지명(地名)을 가리킵니다.

계전(鷄田)은 중국 대륙의 서쪽에 자리하고 있는 옹주(雍州)에 있는 땅 이름으로 항하(黃河)의 물길 가에 있었다고 합니다.

전하는 이야기에 따르면 주(周)나라 문왕(文王)이 암탉을 얻고 왕업(王業)을 이루었다고 하는데, 춘추시대(春秋時代) 춘추오패(春秋五覇)의 한 사람인 진목공(秦穆公)도 이곳에서 암탉을 얻고 패업(覇業)을 이루었다고 합니다. 계전(鷄田) 아래에 보계사(寶鷄祠)가 있는데 이곳은 진(秦)나라가 교사(郊祀)를 지낸 곳이라 합니다. 교사(郊祀)는 임금이 동지(冬至)에 남쪽 교외(郊外)에 나가 하늘에 제사지내고, 하지(夏至)에는 북쪽 교외(郊外)에 나가 땅에 제사를 올렸던 것을 말합니다. 남교(南郊)에서 하늘에 제사하는 것을 '교(郊)'라 하고, 북교(北郊)에서 땅에 제사하는 것을 '사(祀)'라 합니다. (雞田在雍州 昔 周文獲雌而王 秦穆獲雌而覇 下有寶雞祠 秦郊祀處)

적성(赤城)은 옛 제왕(帝王)의 궁성(宮城)의 벽채(壁彩)가 붉은 데서 온 말이라고 합니다. 보통 기주(夔州) 어복현(魚腹縣)에 있다고 하는데 이 적성도 중국의 서북부(西北部)에 있다고 합니다.(赤城 在夔州魚腹縣)

그런데 이 적성(赤城)은 고대에 전쟁의 신(神)이라 일컬어지는 우리의 자랑스러운 동이족(東夷族) 치우천왕(蚩尤天王)이 살던 곳이라 합니다.

치우(蚩尤)라는 말이 나왔으니 치우에 대하여 잠깐 언급하고 글을 마칠까 합니다.

치우천왕이 생소한 분도 계실 줄 알지만 2002 월드컵에서 맹위를 떨쳤던 붉은악마는 잘 아실 것입니다. 붉은악마의 휘장에 그려진 모습이 치우천왕입니다.

군신(軍神)으로 알려진 치우천왕은『신시역대기(神市歷代記)』에 의하면 배달국(倍達國) 제14대 천왕인 자오지환웅(慈烏支桓雄)이라 합니다. 세상에서는 치우천왕이라 하며 청구국(靑邱國)으로 도읍을 옮겨서 재위 109년에 151세까지 사셨다고 합니다.

《환단고기(桓檀古記)》삼성기전(三聖記全) 상』 에 이런 글이 있습니다.

「신시(神市) 말기에 치우천왕(蚩尤天王)이 있어 청구(靑邱)를 개척하여 넓혔으며, 배달국이 18세(世)를 전하여 1565년을 지냈다.」

『삼성기전(三聖記全) 하』에 또 이런 글이 있습니다.

「또 몇 대를 전하여 자오지환웅(慈烏支桓雄)이 있었는데 신령한 용맹이 뛰어나고 동두철액(銅頭鐵額)으로써 짙은 안개를 일으켰으며 구치(九治)라는 채광기(採鑛機)를 만들어 광석을 캐어 철을 주조해 병장기를 만들어 내니 온 천하가 두려워 하였다. 세상에서는 이를 치우천왕(蚩尤天王)이라 일컬었는데 치우란 속언(俗言)에 따르면 엄청난 우레비를 내리게 하여 산과 강을 바꾸게 한다는 뜻이다.

치우천왕은 염제신농(炎帝神農)이 쇠퇴하는 것을 보고는 드디어 웅대한 뜻을 세워 서쪽에서 천병(天兵)을 여러 번 일으키고 삭도(索度)로부터 진군하여 회(淮)와 대(岱)의 사이를 차지하였다.

헌원(軒轅) 후(侯)가 일어나자 곧장 탁록(涿鹿)의 벌판으로 나아가 훤원을 사로잡아 신하로 삼고 후에 오장군(吳將軍)을 서쪽으로 보내어 고신(高辛)을 쳐서 공을 세우게 하였다.

이때 제하(諸夏)가 셋으로 나뉘어 서로 대치하고 있었는데 탁(涿)의 북쪽에는 대요(大撓), 동쪽에는 창힐(倉頡), 서쪽에는 헌원(軒轅)이 있어 서로 군사를 내어 승리를 독차지하려 했으나 이루지 못하였다. 처음에는 헌원이 치우천왕보다 조금 뒤에 일어났다. 그래서 싸울 때마다. 불리하여 대요에게 의지하고자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창힐에게도 의지하려 했으나 허사였는데 이는 두 나라가 모두 치우천왕을 따르는 무리였기 때문이다.

대요는 일찍이 치우천왕으로부터 간지(干支)의 이치를 배웠고, 창힐은 치우천왕으로부터 부도(符圖)의 글을 받았으니 당시의 제후들이 모두 신하로서 천왕을 섬긴 것은 이때문이었다.

사마천(司馬遷)은 《사기(史記)》에 이르기를 '제후들이 모두 헌원에게 복종하였으나 다만 치우만은 가장 사나워서 그를 토벌할 수 없었다'고 하였다.

헌원이 섭정할 때 치우에게는 81인의 형제가 있었는데 모두 몸이 짐승처럼 보이나 사람의 말을 했고 머리를 구리로 두르고 이마를 쇠로 가린 모습을 하고 사염(沙塩)을 먹었으며 오구장(五丘杖)ㆍ도(刀)ㆍ극(戟)ㆍ태노(太弩)를 만들어 쓰니 그 위엄이 천하(天下)에 떨쳤다.

치우(蚩尤)는 옛 천자(天子)의 이름이다. 」

치우천왕은 이른바 동두철액(銅頭鐵額) 곧 구리로 된 머리와 쇠로된 이마를 가지고 모래와 쇠가루를 먹고 산다고 알려져 있는데, 이는 치우천왕이 처음으로 갑옷과 투구를 만들어 쓴 것을 몰랐던 것입니다. 이 시대가 철기시대나 동기시대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치우천왕은 중국의 삼황오제(三皇五帝) 중의 한 사람인 황제헌원(黃帝軒轅)과 싸워 번번히 일흔세 번이나 이겼으나 황제의 지남차(指南車)의 위력 때문에 패사(敗死) 했다고 중국의 《이십오사(二十五史)》에 기록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의 진위는 의심스러운 바가 있다고 합니다. 그것은 치우가 황제가 죽은 뒤 80년이나 생존하면서 티벳(西藏)으로 판명된 장당경(藏唐京)에서 왕 노릇을 했다는 설이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중국에서는 1990년대이후 동북공정(東北工程)일환으로 우리의 치우천왕을 한족(漢族)의 조상으로 둔갑시키고 있다고 합니다. 역사왜곡이지요. 실은 중국이 자신의 조상이라 일컫는 황제(黃帝)를 비롯한 삼황오제(三皇五帝)가 모두 동이족(東夷族)이란 사실입니다.

적성(赤城)을 설명하다 적성이 치우(蚩尤)와 관련되다 보니 설명이 길어졌습니다. 참고 삼아 적어본 것입니다.

계전(鷄田)과 적성(赤城)은 만리장성(萬里長城) 밖의 변방으로 아득한 곳입니다. 그렇지만 이곳은 만리장성의 안문관(雁門關)과 더불어 북방의 중요한 요새(要塞)였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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