千字文 工夫

昆池碣石 鉅野洞庭

bindol 2020. 11. 14. 05:37

昆池碣石 鉅野洞庭

 

本文

昆池碣石 鉅野洞庭 곤지갈석 거야동정

못으로는 昆明池요 산으로는 碣石山 평야로는 鉅野요 호수로는 洞庭湖.

訓音

맏 곤 못 지 비 갈 돌 석

클 거 들 야 골 동 뜰 정

 

解說

중국에는 오악(五嶽) 뿐만 아니라 험한 산, 넓은 호수와 못, 그리고 드넓은 평야가 펼쳐져 있는데, 못으로는 곤지(昆池)요 산으로는 갈석산(碣石山)이며, 평야로는 거야(鉅野)요 호수로는 동정호(洞庭湖)라 합니다. 여기에는 어떤 이야기가 담겨 있는지 하나하나 공부해 보겠습니다.

곤지갈석(昆池碣石) 못으로는 곤명지(昆明池)요 산으로는 갈석산(碣石山)

()은 일() + ()의 회의자(會意字), 태양[] 아래 여럿이 나란히[] 모여 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함께같다' 등의 뜻을 나타냅니다. 곤동야(昆同也)라 했으니 '()은 같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여럿 가운데 ''의 뜻도 나타냅니다. '()'이라고 하지요. 또 곤()을 발이 많은 벌레를 상형(象形)한 상형자(象形字)로 보아, '벌레곤충'의 뜻을 나타냅니다. 벌레를 곤충(昆蟲)이라 합니다.

()는 수() + ()의 형성자(形聲字), '()''꾸불꾸불하다'의 뜻입니다. 꾸불꾸불한 모양의 물웅덩이, ''의 뜻을 나타냅니다. 지피야(池陂也)라 했으니 '못은 땅을 파서 물을 괴게 한 곳' 입니다. 못은 보통 연못이라 하지요.

()은 석() + ()의 형성자(形聲字), '()''높히 걸다'의 뜻이니 두드러지게 높은[] []의 뜻을 나타냅니다. 갈특립지석야(碣特立之石也)라 했으니 '()은 우뚝 솟은 돌'입니다. '산이 우뚝 솟은 모양'을 뜻하기도 합니다. 또한 '세운 돌'이란 뜻에서 '비석'을 뜻하기도 하는데, 비석의 모양이 '네모진 것을 비()'라 하고 '둥근 것을 갈()'이라 합니다. ()은 비신(碑身)에 가첨석(加檐石)을 얹지 아니하고, 머리 부분을 둥글게 만든 작은 비석을 말합니다.

()은 상형자(象形字), '()''언덕', '()''돌멩이'를 본떠, 언덕[] 아래 굴러 있는 돌멩이[]를 뜻하여 ''을 나타낸 자입니다.

곤지갈석(昆地碣石)은 곤지(昆池)와 갈석(碣石)을 말합니다. 이는 '못으로는 곤지(昆池)요 산으로는 갈석산(碣石山)이 대표적이다' 라는 뜻입니다.

곤지(昆池)는 중국 대륙의 서남쪽 운남성(雲南省) 곤명현(昆明縣)에 있는 곤명지(昆明池)를 말합니다.

곤명(昆明)은 지금의 운남성(雲南省) 대리주(大理州) 일대에 살았던 이민족의 이름입니다. 이들이 사는 부족국가인 곤명국(昆明國)은 신독국(身毒國) 즉 천축국(天竺國)으로 가는 중요한 교통로에 위치해 있었습니다. 천축국(天竺國)은 인도(印度)를 말합니다. ()나라의 무제(武帝 BC 156 ~ BC 87. 재위 BC 141 ~ BC 87)가 신독국과 교류하기 위해서 사신을 보냈으나 곤명국이 이를 저지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한무제(漢武帝)는 이곳을 정벌하고자 하였으나 이곳은 사방 300리의 성지(城池)가 있어 뜻을 이룰 수 없었습니다. 이곳을 정벌하려면 수중전(水中戰)을 해야 했는데 300여리의 호수 가운데 있는 나라를 치는 것은 용의주도한 작전이 있어야 했습니다.

무제는 기원전 120년인 원수(元狩) 3년에 장안(長安) 서남쪽에 주위 40리의 인공호수를 조성하여 수중전을 연습하며 그 이름을 곤지(昆池)라 하였습니다. 이러한 한나라의 정벌욕에 견딜 수가 있었겠습니까? 결국 기원전 109년에는 전()과 곤명(昆明) 두 부족이 살던 곳에 익주군(益州郡)을 설치했다고 합니다.

무제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으니 무제에 대여 간략히 알아보고자 합니다.

무제(武帝 BC 156 ~ BC 87. 재위 BC 141 ~ BC 87)는 중국 문화의 황금기를 이룩했다고 평가되는 황제입니다. 고조(高祖)가 천하를 통일한 후 크고 작은 변란이 수차례 있었지만 평정되어 나라는 비교적 평화로운 안정을 유지하면서 황위를 이어갔습니다. 중국에 있어 북방에는 흉노족(匈奴族)이 있어 늘 위협이 되고 근심거리였는데 고조는 자신의 딸을 흉노족에게 시집보내며 흉노족과 화친정책을 썼던 것입니다.

그러다가 제7대 황제인 무제가 열여섯 살 나이로 즉위하여 중앙 집권을 강화하고 인재를 등용하여 정책을 펴 나가니 물산이 풍부해지는 등 국력이 향상되기에 이르렀습니다. 국력이 강해지니 흉노족과의 화친정책을 재고하기에 이릅니다.

무제는 장건(張騫)으로 하여금 천축(天竺)과의 교역을 하기 위하여 사주지로(絲綢之路. 비단길. 실크로드)를 개척하게 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흉노족은 걸림돌이었기에 정벌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입니다.

한무제는 진시황(秦始皇)과 같이 호전적(好戰的) 기질이 강하여 화친책을 강경책으로 바꾸고 흉노를 치기에 이르는데 이 과정에서 곤명국을 치기 위하여 곤지(昆池)라는 인공호수를 건설하여 수중전(水中戰)에 대비했던 것입니다.

무제는 남월을 쳐 평정하여 9()을 설치하고, 서남이(西南夷)를 쳐 평정하여 5()을 설치했으며, 동으로 고조선(古朝鮮)을 쳐 4()을 설치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이 한사군(漢四郡)이 한반도내에 설치되었던 것이 아니라 요하(遼河) 서쪽에 설치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수많은 정복전쟁으로 국고를 탕진했는데 이를 위하여 소금과 철과 황, 술을 전매하여 국고를 확충하기도 했는데, 수입을 증대하는 과정에서 가혹한 정책을 펴 원성이 높아졌고, 진시황이 그랬던 것처럼 방사(方士)를 모아 불로장생(不老長生)을 꾀하여 태산(泰山)에서 봉선의식(奉禪儀式)을 거행하는가 하면 궁전과 이궁(離宮)을 지어 백성의 원성을 사기도 했습니다. 후에 반성하여 전쟁을 중지하고 내치에 힘써 다시 안정을 찾았고 순행(巡行) 중 병을 얻어 죽기 전에 8세인 유불릉(劉弗陵)을 황태자로 봉하고 순행 중 71세에 병사했다고 합니다.

갈석(碣石)은 갈석산(碣石山)을 말하는데 바위가 우뚝 솟은 산을 말합니다. 갈특립지석야(碣特立之石也)라 했으니 '()은 우뚝 솟은 돌'입니다. '산이 우뚝 솟은 모양'을 뜻하기도 합니다. 따라서 갈석은 바위가 우뚝우뚝 솟은 산을 말합니다.

갈석산(碣石山)은 고대로부터 유명하여 아홉 황제가 오른 산이라 하여 구등황제산(九登皇帝山)이라 할 정도로 유명한 산입니다. 진시황(秦始皇)을 비롯하여 한무제(漢武帝) 수양제(隋煬帝) 당태종(唐太宗) 등 아홉 황제가 올랐다고 합니다.

기원전 215년에 진시황이 동쪽을 순시하다가 갈석산(碣石山)에 이르러 자신의 천하통일의 위업을 칭송하는 갈석문사(碣石門辭)를 새기도록 했다고 합니다

갈석(碣石)은 동해변(東海邊)에 있는데 진시황(秦始皇)이 동쪽지방을 순시하다가 갈석산(碣石山)에 이르러 바다 가운데 세 개의 산을 바라보면서 말했습니다.(碣石山在東海邊 始皇東遊至碣石山 望見海中三山 問曰)

"저 산은 어떤 산인가?"

이때 진시황을 따르던 방사(方士)인 서불(徐巿)이 대답했습니다.

"그것은 봉래산(蓬萊山) 방장산(方丈山) 영주산(瀛州山)으로 삼신산(三神山)인데 그 속에 석실(石室)이 있어 일만명이 앉을 수 있고 그 사람들은 모두 선약(仙藥)으로 장생불사(長生不死)하옵니다."

이 소리를 들은 진시황이 귀가 번쩍하여 그 선약을 얻고자 서불로 하여금 동남동녀(童男童女) 3000명을 보내서 선약을 구하게 했는데 끝내 돌아아오지 않았다고 합니다. 자신이 이룩한 통일제국이 만세(萬歲)까지 유지되기를 기원하며 불로영약(不老靈藥)을 구하여 불로장생(不老長生)을 꾀하였으나 무위로 끝나고 만 것입니다.

그는 자신이 이룩한 위대한 땅을 밟아 보고자 지방을 순수(巡狩)하던 중 병을 얻어 운명하고 말았으니 그의 춘추 향년 50세였습니다. 왕위에 오른지 37년이요 천하를 통일한 지 12년 되던 해였습니다. 이때가 B.C 210년이었습니다.

그런데 갈석산(碣石山)은 어디에 있는가? 이에 대하여 설이 분분합니다. 갈석산은 만리장성(萬里長城)의 시작점이라고 여러 역사지리서에 나옵니다. 현재 중국에서는 갈석산이 북경(北京) 근처인 하북성(河北省) 진황도시(秦皇島市) 창려현(昌黎縣)에 있다고 알려져 있는데 산의 높이가 해발 695.1m라 합니다. 그런데 이 갈석산이 만리장성의 시작점이라는 사실과 다르다고 합니다.

()나라 사마정(司馬貞)사기(史記)를 주석한 사기색은(史記索隱)에 이르기를,

"태강지리지(太康地理志)에서 말하되 '낙랑군(樂浪郡) 수성현(遂城縣)에는 갈석산(碣石山)이 있으며 장성(長城)이 여기에서 시작한다."

(史記索隱 太康地理志云 樂浪遂城縣有碣石山 長城所起)

이밖에도 수많은 전적에서 갈석산의 기사를 싣고 있습니다. 낙랑군 수성현에 갈석산이 있고 장성이 여기서부터 일어났다고 적고 있습니다. 그런데 창려현에는 그런 흔적이 없다고 합니다.

갈석산(碣石山)이 낙랑군(樂浪郡) 수성현(遂城縣)에 있다고 하니 지금의 하북성(河北省) 보정시(保定市) 서수현(徐水縣) 수성진(遂城鎭)이라고 합니다.

이곳에 있는 산의 현재의 이름은 백석산(白石山 해발 2,096m)인데 이곳이 역사적인 갈석산(碣石山)이라 합니다. 더 구체적으로는 백석산 동쪽의 한 봉우리인 낭아산(狼牙山 해발 1,105m)이라 합니다. 이곳이 장성(長城)이 시작된 지점이라 합니다.

갈석산(碣石山)은 우리나라에서 굉장히 중요시 하는 산입니다. 왜냐하면 갈석산이 고조선의 강역을 알 수 있는 경계지역이기 때문입니다.

전국책(戰國策)》『연책(燕策)에 이런 글이 있습니다.

()나라의 동쪽에는 조선(朝鮮)과 요동(遼東)이 있고, 북쪽에는 임호

(林胡)와 누번(樓煩)이 있으며, 서쪽에는 운중(雲中)과 구원(九原)이 있고,

남쪽에는 녹타(菉沱)와 역수(易水)가 있다. 지방이 이천여 리이다. .. 중략 ..

남쪽에는 갈석(碣石)과 안문(鴈門)의 풍요로움이 있고 북쪽에는 대추와 밤의 이로움이 있다. 백성들이 비록 농사짓지 않아도 대추와 밤이 넉넉하므로 이것이 이른바 천부(天府)이다.

(燕東有朝鮮遼東 北有林胡樓煩 西有雲中九原 南有菉沱易水 地方二天餘里

... 中略 ... 南有碣石 鴈門之饒 北有棗栗之利 民雖不佃作而足於棗栗矣

此所謂天府者也)

()나라는 진시황에 의해 진나라 영토가 되었는데 갈석산이 그 경계입니다. 갈석산 동쪽에 조선(朝鮮)이 있고 요동(遼東)이 있다고 했으니 고조선의 강역은 갈석산 동쪽으로부터 시작됨을 알 수 있습니다.

소위 한()나라가 고조선을 멸하고 한사군(漢四郡)을 설치했는데, 한사군이란 이른바 낙랑군(樂浪郡)진번군(眞蕃郡)현토군(玄菟郡)임둔군(臨屯郡)을 말합니다. 각각의 위치에 대하여 우리는 낙랑군은 한반도의 평양지역, 진번군은 황해도지역, 현도군은 백두산 일대, 임둔군은 함경도 지역에 있었다고 배웠습니다. 이런 설을 고착화시킨 것은 식민사관에 의하여 우리 역사를 왜곡시킨 것인데 지금은 한사군 한반도설은 신빙성이 없어 폐기된 상태라고 합니다. 지금은 요하(遼河) 서쪽에 있음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갈석산(碣石山)이 낙랑군(樂浪郡) 수성현(遂城縣)이라 하니 한사군의 하나인 낙랑군이 이곳에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낙랑군은 고조선의 심장부인 왕검성(王儉城)이 있던 곳입니다. 요동(遼東)은 고구려의 요람이었습니다. 훗날 고구려가 낙랑군을 축출했으니 고구려의 강역이 여기까지 미치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갈석산(碣石山)은 고대에 우리나라의 강역을 알 수 있는 중요한 지표였던 것입니다. 다음은 거야동정(鉅野洞庭)인데 다음에 살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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昆池碣石 鉅野洞庭

 

本文

昆池碣石 鉅野洞庭 곤지갈석 거야동정

못으로는 昆明池요 산으로는碣石山 평야로는 鉅野요 호수로는 洞庭湖.

訓音

맏 곤 못 지 비 갈 돌 석

클 거 들 야 골 동 뜰 정

解說

지난 시간에는 곤지갈석(昆池碣石)에 대하여 상세히 공부한 바 있는데 이번 시간에는 거야동정(鉅野洞庭)이 무슨 뜻인지에 대하여 공부해 보고자 합니다.

거야동정(鉅野洞庭)

평야(平野)로는 거야(鉅野)요 호수(湖水)로는 동정호(洞庭湖)

()는 금() + ()의 형성자(形聲字), '()'단단한 금속'을 뜻하고, '()''크다. 크게'의 뜻이니, '대단히 단단하다. 크다'의 뜻입니다.

()는 리() + ()의 형성자(形聲字), '()''넓고 활달하다'는 뜻이고, '()''고을'이라는 뜻이니, '넓고 활달한 고을, , 교외(郊外)'의 뜻을 나타냅니다.

()은 수() + ()의 형성자(形聲字), '()''속이 비었다'는 뜻입니다. 물이 빠져나가는 ''의 뜻을 나타냅니다. 본뜻은 '재빨리 흐르는 것'이며, '바위 구멍'이란 뜻도 있어 '깊은 구멍, '의 뜻을 나타내며, 또한 ', 골짜기' 의 뜻도 나타냅니다. 은 통할 통, 꿰뚫을 통으로도 쓰입니다. 막힘이 없이 트인 것을 말합니다.

()은 엄(广) + ()의 형성자(形聲字), '()'은 궁전으로부터 쑥 내민 '정원'의 뜻입니다. '(广)'을 붙여 ''의 뜻을 나타내었습니다.

거야동정(鉅野洞庭) 평야로는 거야(鉅野), 호수로는 동정호(洞庭湖)라는 뜻입니다. 이는 '평야로는 거야가 유명하고, 호수로는 동정호가 제일이다' 라는 뜻입니다.

거야(鉅野)는 소택(沼澤)의 이름으로 거록군(鉅鹿郡)에 있다 하였습니다. 거록군은 지금의 산동성(山東省) 거야현(鉅野縣) 북쪽 5리에 있다고 합니다. 일명 대야(大野)라 부르기도 하고 거택(巨澤)이라 하기도 합니다. ()'대단히 크다는 뜻이고, ()'넓고 활달한 들, 교외(郊外)'를 말합니다.

지난 번 구주우적(九州禹跡)을 공부할 때, 서경(書經)하서(夏書)』「우공(禹貢)편에 우()가 홍수를 다스리고 구주(九州)로 나눈 업적을 기록한 글을 살핀 적이 있습니다. 그 중에 서주(徐州)에 대한 기사 가운데 거야(鉅野)와 관련한 기록이 있습니다.

바다와 태산(泰山)과 회수(淮水) 사이에 서주(徐州)가 있습니다. -서주(徐州)는 지금의 산동성(山東省) 남부와 회하(淮下) 이북입니다.- (海岱及淮 惟徐州) 회수(淮水)와 기수(沂水)를 다스리자 몽산(夢山)과 우산(羽山) 지역에도 곡식을 심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대야호(大野湖)의 둑을 쌓자 동원(東原) 땅이 평탄하게 되었습니다. (淮沂其乂 蒙羽其藝 大野既豬 東原厎平)

이곳의 흙은 붉고 찰지고 기름져 초목이 무성하게 잘 자랐습니다. 이곳의 밭은 상중(上中)인데 부과된 세는 중중(中中)이었습니다. ..... 중략 ....

(厥土赤埴墳 草木漸包 厥田惟上中 厥賦中中)

여기서 대야(大野)가 바로 거야(鉅野)입니다. 이는 상고시대의 9(九澤) 중 하나인데, 9택은 양자강(揚子江) 일대 좌우에 있는 못으로, 그 이름은 대륙(大陸), 뇌하(雷夏), 맹제(孟諸), 하택(荷澤), 영택(榮澤), 대야(大野), 팽려(彭蠡), 진택(震澤), 운몽(雲夢) 이라 합니다.

거야(鉅野)와 관련하여 빼 놓을 수 없는 것이 동이족(東夷族)이라 불리는 치우천왕(蚩尤天王)과 관련한 일입니다. 치우천왕에 대해서는 앞서 <계전적성(鷄田赤城>에서 다루었기에 간단히 적어 보고자 합니다.

치우천왕은 싸우면 이기는 전쟁의 영웅이라하여 '전쟁의 신()'이라 불릴 정도였는데 훤원((軒轅)과 싸워 매번 승리하였고 훤원을 사로잡아 신하로 삼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중국의 사기의 저자 사마천(司馬遷)은 이와 반대로 치우와 훤원이 싸우기를 73번을 했으나 모두 치우가 승리했지만 최후에 탁록대전(涿鹿大戰)에서 승리하여 치우를 사로잡아 죽였다고 기술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정사(正史)가 되어 내려오고 있지만 민족 사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이것은 역사 왜곡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때 죽은 사람은 치우군((蚩尤軍)의 부장 81명 중 한 사람인 치우비(蚩尤飛)가 공을 성급히 다투다 전사했는데 사마천은 이를 두고 치우라고 적고 있다는 것입니다.

치우천왕와 거야(鉅野)와 관련해서는 치우의 무덤에 관련한 기사입니다.

황람(皇覽)에 이르기를 치우총(蚩尤冢)은 동평군 수장현 관향성 안에 있으며 높이는 일곱 길이나 되며 백성들이 항상 10월에 제사를 지내는데 붉은 기운이 비닷같이 솟아 올라 사람들이 "치우기(蚩尤旗)" 라고 부른다. (皇覽曰 蚩尤冢 東平郡 壽張縣 關鄕城中 高七丈 民常十月祀之 有赤旗出如匹縫 帛民名爲蚩尤旗)

그런데 거야(鉅野)에 치우의 견비총(肩臂冢 )이 또 있다고 합니다.

견비총 재산양군 거야현(肩臂冢 在山陽郡 鉅野縣

이를 두고 해석이 대략 두 가지로 나뉘고 있습니다.

"어깨와 팔의 무덤이 산양군 거야현에 있다." "치우의 부인의 묘가 산양군 거야현에 있다." 가 그것입니다. '견비총'의 해석을 글자 그대로 해석한 것과 치우와 어깨를 견줄 만한 분은 부인 밖에 없다는 견해에서 나온 것입니다. 사마천의 기록에 의하면 치우를 잡아 죽여 팔다리를 끊어 그를 응징하기 위하여 제후들에게 보냈다고 합니다.

거야(鉅野)는 고대에 우리 동이족이 활발하게 활동하던 무대이고, 중국역사에서도 늘 거야는 전쟁과 관련하여 격전지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동정(洞庭)이란 동정호(洞庭湖)를 말합니다. 동정호(洞庭湖)는 양주(楊州), 지금의 호남성(湖南省) 북부 악양(岳陽)에 있는 호수로, 중국 4대 담수호( 淡水湖) 중 하나로 두 번째로 크다고 합니다. 중국 4대 담수호는 강서성(江西省) 북부의 파양호(鄱阳湖), 호남성 북부의 동정호(洞庭湖), 강소성(江蘇省) 남동쪽의 태호(太湖), 강소성(江蘇省)의 홍택호(洪澤湖)라고 합니다. 동정호는 옛날에는 제일 큰 호수였는데 오랜 세월동안 양자강에서 진흙이 유입되어 육지로 변한 곳이 늘어나 지금은 두 번째라고 합니다.

동정호(洞庭湖)가 얼마나 광활한지 길이가 800리이며, 호수 가운데에는 72개의 군산(群山)이 있다고 합니다. 72개의 섬이 있다는 말이지요. 이 섬들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은쟁반 위의 명주(明珠) 같다고 한다 합니다.

동정호는 옛날부터 명성이 자자해서 수많은 시인 묵객이 이곳을 찾아 시를 읊고 노래하는 명소입니다. 동정호를 노래한 시인 중에는 시성(詩聖)이라 불리는 두보(杜甫)가 으뜸인데 그가 지은 '등악양루(登岳陽樓)'는 동정호를 읊은 시 중에 백미(白眉)라 합니다.

昔聞洞庭水(석문동정수) 옛부터 이름 들어온 동정호(洞庭湖),

今上岳陽樓(금상악양루) 이제야 악양루(岳陽樓)에 올랐어라.

吳楚東南坼(오초동남탁) 오와 초 땅은 호수 동과 남으로 갈라졌고

乾坤日夜浮(건곤일야부) 하늘과 땅이 밤낮으로 떠 있는 것 같네.

親朋無一字(친붕무일자) 친한 벗은 소식 한 자 없고

老病有孤舟(노거유고주) 늙고 병든 몸은 외로운 배를 타고 떠도네.

戎馬關山北(융마관산북) 관산의 북쪽 고향쪽엔 전쟁이 계속 되고 있나니

憑軒涕泗流(빙헌체사류 난간에 기대고서 눈물만 흘리누나.

이 시는 두보가 세연을 거두기 2년 전인 57세에 지은 시로, 말로만 듣던 동정호를 찾아 악양루에 올라 동정호의 광대하고 장엄한 풍광을 바라보면서 외로이 떠도는 자신의 처지와 전쟁에 휩싸인 조국의 현실을 생각하면서 흐르는 눈물을 주체할 수 없었던 소회를 밝힌 시입니다.

동정호(洞庭湖)와 관련된 이야기 중에 굴원(屈原)을 빼놓을 수 없습니다.

전국칠웅(戰國七雄)이 할거하던 전국시대 말, 초사(楚辭)로 유명한 굴원(屈原)은 초나라 왕족으로 태어나 초회왕(楚懷王)을 섬기며 왕권확립에 총력을 기울였는데 이 과정에서 그의 개혁에 반발하는 세력들의 견제와 모략을 받아 마침내 회왕은 그를 멀리 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는 나라를 걱정하는 우국충정을 다했습니다. 그뒤 회왕은 진나라의 혼인 동맹을 맺자는 초청을 받아 진나라에 갔다가 병사하여 돌아오게 됩니다. 진나라의 농간에 당한 것입니다.

그뒤 장자가 왕위에 올라 경양왕(頃襄王)이라 했는데, 그는 굴원과 반목하는 공자 자란(子蘭)을 등용하였습니다. 굴원은 진나라의 농간에 나라가 바람 앞의 등불처럼 위태롭게 되자 왕의 잘못을 지적하고 시정하기를 바랐지만 임금은 듣지 않았고, 간신들이 눈엣가시 같은 굴원을 일제히 참소하니 경양왕은 그를 삭탈관직 시키고 추방령을 내리게 됩니다.

그리하여 굴원은 동정호(洞庭湖) 남쪽으로 쫓겨나게 됩니다. 그는 조국의 운이 다해 가는데 조정에 간신들만 득세하는 현실을 한탄하고 슬퍼하다가 울분 속에서 동정호 동쪽의 멱라수(汨羅水)에 몸을 던져 자살하게 됩니다. 그 날이 55일인데, 그 뒤 이 날이 되면 굴원의 충정을 기리기 위하여 멱라수에서 경도희(競渡戱)를 개최하고 채색 비단줄에 음식을 매달아 강물에 넣어 제사를 지내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것이 단오(端午)의 유래가 되었다고 합니다. 경도희(競渡戱)란 배를 타고 강을 건너는 경주인데, 누가 굴원의 시체를 빨리 건져오나 내기하는 의미라 합니다.

동정호와 관련한 이야기는 많은데 고대 순() 임금이 동정호를 순례하다가 창오(蒼梧)에서 붕어했는데, 이에 순임금의 두 왕비가 순임금의 죽음을 비통하게 여겨 통곡하다가 동정호에 몸을 던졌다는 이야기가 전합니다.

많은 사연을 담고 있는 동정호는 갈수기(渴水期)에는 1/10로 줄었다가 우기(雨期)에는 양자강 강물이 유입되어 거대한 호수가 된다고 합니다. 관광자원 뿐만 아니라 홍수조절, 농업용수, 공업용수로 등으로 활용되는데 근래에는 호수가 옛날과 같지 않게 줄어드는 형세라고 합니다.

중국에는 오악(五嶽)을 비롯한 명산대천(名山大川), 대호(大湖), 거야(巨野)가 많은데, 못으로는 곤지(昆池), 산으로는 갈석(碣石)이며, 들로는 거야(鉅野), 호수로는 동정호(洞庭湖)를 들었습니다. 여기에 거론된 의미를 살펴보니 많은 사연이 깃들어 있음을 알았습니다. 이와 같은 천혜의 자연이 잘 보전되기를 합장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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