千字文 工夫

90. 殆辱近恥 林皐行卽

bindol 2020. 11. 14. 06:16

90. 殆辱近恥 林皐行卽

 

本文殆辱近恥 林皐幸卽 태욕근치 임고행즉

욕됨에 이르면 수치(羞恥)가 눈앞이니

산수간(山水間)에 나아감이 바람직한 일이로다.

訓音

위태할 태 욕될 욕 가까울 근 부끄러울 치

수풀 림 언덕 고 다행 행 곧 즉

 

解說

지난 시간에는 성궁기계(省躬譏誡) 총증항극(寵增抗極)에 대하여 공부하였습니다.늘 자신의 몸을 살펴서 남의 비방을 경계하라 하였습니다. 또한 총애가 날로 더하면 교만해지기 쉬우니 몸가짐을 조심하라는 내용이었습니다.

이번 시간에는 태욕근치(殆辱近恥) 임고행즉(林皐幸卽)에 대하여 공부해 보고자 합니다. 살짝 훑어봐도 요즘의 국정농단(國政壟斷) 탄핵정국(彈劾政局)의 주인공들의 처신을 생각해 보게 됩니다. 무슨 뜻일까 글자부터 하나하나 알아보겠습니다.

태욕근치(殆辱近恥) 욕됨에 이르면 수치(羞恥)가 눈앞이니

우선 글자의 자원(字源)부터 알아보고 그 뜻을 알아보고자 합니다.

()는 알() + ()의 형성자(形聲字)입니다. '()''사체(死體)'의 뜻이고 '()''()''()'와 통하여, '조짐'의 뜻을 갖고 있습니다. 조짐의 뜻에서, '위태롭다'의 뜻을 나타냅니다.

()은 촌() + ()의 회의자(會意字)입니다. '()'''의 뜻이고, '()'은 돌 또는 조개껍데기로 만든 풀 베는 농구(農具)를 본뜬 것입니다. 제초구(除草具)로 풀을 베어 널어 놓다의 뜻에서 패생하여, '싹을 따다, 욕보이다'의 뜻을 나타냅니다.

또는 '()''. '를 뜻하고, '()'은 법()을 뜻합니다. 옛날 농사하는 데, 별로써 때를 알았습니다. 그 때를 잃는 자는 죽이어 욕을 보였으므로 진()과 촌()을 합하여 '욕보이다'의 뜻을 나타내며, 받은 것이 과분하여 송구스럽다는 뜻도 나타냅니다.

()은 착() + ()의 형성자(形聲字)입니다. '()'은 물건을 작게 만들기 위한 칼의 뜻입니다. 거리나 시간을 '작게 하다, 가까이하다'의 뜻을 나타냅니다.

()는 심() + ()의 형성자(形聲字)입니다. '()'''의 상형으로, 부끄러워서 귀가 빨개지다의 뜻인데 여기에 '()'을 붙여서, '부끄러워하다'의 뜻을 나타냅니다.

태욕근치(殆辱近恥)에서 태()'위태할 태, 가까울 태, 거의 태, 다가설 태'로 새겨집니다. ()'욕될 욕, 욕보일 욕, 욕할 욕, 욕 욕' 등으로 새겨지고, ()'가까울 근', ()'부끄러울 치'입니다.

태욕(殆辱)'위태로움과 수치스러움'으로 새기기도 하지만, '수치스러움에 다가서다, 수치스러움에 이르다' '욕됨에 이르다'로 새겨 볼 수 있습니다. 근치(近恥)'치욕(恥辱)에 가깝다, 수치(羞恥)에 가깝다' 즉 수치가 눈앞이다 이런 뜻입니다.

따라서 태욕근치(殆辱近恥)'욕됨에 이르면 수치가 눈앞이다.' 라는 뜻입니다.

노자(老子)》『44장 입계(立戒)편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명성과 목숨 중 어느 것이 소중한가?

목숨과 돈 중에서 어느 것이 귀중한가?

얻는 것과 잃는 것 중에서 어느 것이 괴로운가?

그런고로 너무 소중히 하고 아끼면 반드시 크나큰 손해를 보며

많이 감추어 두면 반드시 크게 잃어버린다.

만족할 줄 알면 욕되지 않을 것이고,

멈출 줄 알면 위태롭지 않고.

언제까지나 장구할 수가 있다.

名與身孰親 身與貨孰多 得與亡孰病 명여신숙친 신여화숙다 득여망숙병

是故甚愛必大費 多藏必厚亡 知足不辱 知止不殆 可以長久

시고심애필대비 다장필후망 지족불욕 지지불태 가이장구

명성과 목숨 중 어느 것이 소중한가 물으면 목숨이 소중하다고 말할 것입니다. 그렇지만 사람들은 목숨을 걸고 명성을 구하려고 애를 씁니다.

또 목숨과 돈 중에 어느 것이 귀한가 물으면 누구나 목숨이 중하다고 말할 것입니다. 그러나 목숨을 내놓고 악착같이 돈을 벌고자 합니다. 정당하게 노력하여 버는 돈을 누가 뭐라 할까마는 문제는 돈이라하면 물불을 가리지 않고 부당한 방법으로 벌려고 하는 데 있습니다. 뻔히 걸리면 형벌을 받을 것임에도 불구하고 남의 돈을 내손에 넣으려고 도둑질을 하고 사기치거나 횡령을 하고 심지어는 인명을 해치는 일도 서슴치 않습니다.

아무리 소중한 명예와 재물이라도 자신의 목숨과 바꿀 수는 없습니다. 무릇 지나치면 욕이 돌아오고 겸손하면 칭찬을 받는 법입니다. 높은 지위를 얻었다 해서 많은 재물이 있다고 해서, 지나친 욕심을 부리면 자리는 위태롭게 되고 욕됨이 이르게 됩니다. 그래서 자기의 분수를 알면 욕됨이 이르지 않고, 멈춤을 알면 위태롭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에는 어리석고 용렬한 자가 많아서 분수를 알지 못해 욕을 당하고 멈춤을 알지 못해 구렁텅이에 빠지는 자가 부지기수입니다.

그런데 어리석고 용렬한 자는 교만한 법이어서 자신의 지위나 재력을 믿고 권력을 휘두르고 남용하여 세상사람들의 지탄을 받아 욕됨에 이르렀는데도 부끄러운 기색도 없이 자신의 잘못을 반성하기는커녕 무엇을 잘못했는지 모르겠다고 오히려 뻔뻔하게 반격하곤 합니다.

맹자(孟子)》『진심장구 상(盡心章句上)에서 맹자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에게는 부끄러워하는 마음이 없어서는 안 된다.

부끄러워하는 마음이 없는 것을 부끄러워하면 부끄러워할 것이 없다."

[人不可以無恥 無恥之心 無恥矣(인불가이무치 무치지심 무치의)]

부끄러워하는 마음을 수오지심(羞惡之心)합니다. 이를 맹자께서는 사단(四端)의 하나로 세우면서 이는 의()의 근본이라 했습니다. 맹자께서는 측은지심(惻隱之心), 시비지심(是非之心), 사양지심(辭讓之心), 수오지심(羞惡之心) 이 네 가지 마음 가운데 어느 하나라도 없으면 사람이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무릇 사람이란 자기가 잘못을 했다면 마땅히 부끄러운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부끄러운 짓을 하고도 부끄러워 할 줄 모른다면 정말 부끄러운 일입니다. 이 부끄러워하는 마음이 없다면 얼마나 구차한 삶을 사는 것인가?

다음은 법구경(法句經)》『진구품(塵口品)의 부처님 게송입니다.

구차한 삶 살면서도 염치 모름이

긴 부리를 갖고 있는 까마귀 같아

뻔뻔하여 욕을 참고 허세부리는

이런 삶을 더러운 삶이라 한다.

苟生無恥 如鳥長喙 强顔耐辱 名曰穢生

구생무치 여조장훼 강안내욕 명왈예생

그렇게 하면 안 되는 구차한 삶을 살면서도 부끄러움을 모르고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것은 마치 긴 부리를 교만하게 놀리는 까마귀처럼... 누가 뭐래도 얼굴에 두껍게 철판을 깐 듯 뻔뻔스러운 사람, 이미 부끄러움을 모르기 때문에 누가 욕을 해도 괜찮은 듯 참아 내며 허세를 부립니다. 부끄러움을 모르는 이와 같은 삶을 '더러운 삶[穢生]이라고 부릅니다. 후안무치(厚顔無恥). 뻔뻔스러워 부끄러움을 모른다는 말씀입니다. 더러운 삶은 청산해야 할 대상입니다.

작년 가을에 터진 소위 '박근혜 최순실 국정농단(朴槿惠 崔順實 國政壟斷)사태'로 현재 탄핵정국(彈劾政局)인데, 당사자인 대통령이나 비선실세, 관련자들의 행태를 보면 부끄러운 기색도 없이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모르쇠로 일관하는 것을 보면 참으로 구차한 모습이라 후안무치(厚顔無恥)의 전형을 보는 것 같아 씁쓸합니다. 이런 삶은 '더러운 삶[穢生]'이 아닐 수 없습니다.

사람의 욕심은 한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 욕심을 멈추지 않는 한 욕심을 채우기도 전에 욕된 꼴을 당하여 추락하고 말 것이니, 과욕(過慾)은 화()를 부르고[過慾招禍] 욕됨에 이르면 수치가 눈 앞에 있음[殆辱近恥]을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만족을 알면 욕되지 않고 멈출 줄 알면 위태롭지 않습니다.

욕됨에 이르면 수치가 눈 앞에 가까이 있음을 안다면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이에 대한 처세는 임고행즉(林皐幸卽)인데 다음 시간에 공부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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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 殆辱近恥 林皐幸卽

 

本文殆辱近恥 林皐幸卽 태욕근치 임고행즉

욕됨에 이르면 수치(羞恥)가 눈앞이니

산수간(山水間)에 나아감이 바람직한 일이로다.

 

解說

지난 시간에는 욕됨에 이르면 수치(羞恥)가 눈 앞에 가까워진다는 태욕근치(殆辱近恥)에 대하여 공부하였는데, 이번 시간에는 그에 상응하여 취할 수 있는 처세인 임고행즉(林皐行卽)에 대하여 공부할 차례입니다. 무슨 뜻인가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임고행즉(任皐行卽) 산수간(山水間)에 나아감이 바람직한 일이로다.

우선 글자의 자원(字源)부터 알아보고 그 뜻을 알아보고자 합니다.

()은 목() + ()의 회의자(會意字), 나무가 늘어선 모양에서, '수풀'의 뜻을 나타냅니다.

()는 상형자(象形字), 흰 머리뼈와 네발짐승의 주검의 희게 빛나다의 뜻을 나타냅니다. 파생하여 수면이 희게 빛나는 ''의 뜻을 나타냅니다.

()은 상형자(象形字), 쇠고랑의 상형(象形)입니다. '()'이 쇠고랑을 찬 사람의 상형인데 반하여, ()은 다행이도 쇠고랑을 면하여 행복한 뜻을 나타냅니다.

()은 비() + (. )의 회의자(會意字), '()'는 먹을 것의 상형이고, '()'은 무릎 꿇은 사람의 상형입니다. 사람이 밥 먹는 자리에 나아가다의 뜻에서, 일반적으로 '나아가다'의 뜻을 나타냅니다. , ''의 뜻으로 쓰입니다.

임고행즉(林皐幸卽)에서 임()'수풀 림', ()'물가 고, 늪 고', ()'다행 행, 바랄 행, 기뻐할 행, 즐길 행', ()'곧 즉, 나아갈 즉'입니다.

임고(林皐)에서 임()은 평탄한 땅에 우거진 수풀이고, ()'물가, '이란 뜻이니, 임고(林皐)'숲이 있는 물가, 소택(沼澤)이 있는 숲'을 말합니다. , ()은 산림(山林)을 말하고, ()는 물가를 뜻하니 산천(山川) 혹은 산수(山水)라고 풀이할 수도 있습니다.

행즉(幸卽)'즉시 가는 것이 바람직하다, 즐겨 나아가야 한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임고행즉(林皐幸卽)'산수간(山水間)에 즉시 나아감이 바람직한 일이다.' 라고 새겨집니다. 또는 '산천(山川)에 나아가 즐길 일이다.' 라고 풀이할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임고행즉(林皐幸卽)'산수간에 나아감이 바람직한 일이다.' 또는 '산천(山川)에 나아가 즐길 일이다.'라고 새겨집니다.

산수간에 사는 삶이란 자연과 더불어 사는 삶이니 자연에 순응하는 삶에는 거짓이 끼어들 여지가 없습니다. 거짓이 없으니 다툴 일이 없고 자신을 나타내기 위하여 권위를 세우고 세력을 도모할 일도 없습니다. 자연속에 자재로이 소요유(逍遙遊)하면 도인이 따로 없을 것입니다.

그러면 왜 산수간(山水間)에 즉시 나아감이 바람직한 일이고, 산천(山川)에 나아가 즐길 일인가 하면, 앞 절의 태욕근치(殆辱近恥)에 기인합니다. 욕됨에 이르렀는데도 버티기에 들어가면 수치(羞恥)스러운 치욕(恥辱)을 당하기 쉽기 때문입니다. 자리에 연연하지 않고 훌훌 털고 산수간에 유유자적(悠悠自適)하는 것이 마음 편하기 때문입니다.

세속의 벼슬길에 나아가 지위가 높아지고 총애가 높아지면 스스로 자신을 돌아보고 마음가짐이 겸손해져야 하는데,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교만심이 일어나기 쉽고 권력을 행사하고 싶은 마음에 그 힘을 부당하게 행사하기 일쑤입니다. 그렇게 되면 온갖 비리(非理)가 그로부터 생기게 되고, 그 힘에 의해 압제(壓制)되는 사람은 항거심(抗拒心)이 들어 부당한 압제에 항거하게 되고 그 비리를 고발하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영화는 다시 욕됨에 이르게 되는데 그 이전에 자신의 과오를 반성하고 물러나면 다행이려니와 한번 잡은 권력을 놓기 싫어하면 치욕을 당하기에 이르게 됩니다.

작년 가을에 터진 소위 '박근혜 최순실 국정농단(朴槿惠 崔順實 國政壟斷)사태'로 국회에서 대통령 탄핵(彈劾)이 발의되기까지 국민들은 대통령의 혼용무도(昏庸無道)에 대한 분노로 들끌어 촛불을 들고 대통령의 하야(下野)를 외쳤습니다. 여기서 하야(下野)는 관직에서 물러나 야인(野人)으로 돌아간다는 의미인데, 천자문의 임고행즉(林皐幸卽)과 맞닿아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대통령이 헌법을 유린(蹂躪)하여 국정(國政)을 수행(遂行)할 수 없게 되었으니 욕됨에 이른 것입니다[태욕근치(殆辱近恥)]. 열화와 같은 하야 요구에도 불구하고 요지부동(搖之不動)하다가 급기야 탄핵이 발의되어 탄핵 결정을 앞두고 있는 상황입니다.

헌법을 준수하고 국민을 사랑으로 포용할 수 있는 지혜와 아량이 있었더라면 욕됨에 이르지 않았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많이 남습니다. 대개 욕됨에 이르는 것은 남의 충언(忠言)을 듣지 않는데 있습니다. 충언을 하고 직간(直諫)하는 것은 그 사람뿐만 아니라 나라와 국민을 사랑하기 때문인데 어리석고 용렬한 자는 이를 내치니 이러고도 직위를 보전하거나 보신을 한 자는 고금에 없습니다.

욕됨에 이르면 참회하고 물러나야 합니다. 자신의 과오를 통렬히 반성하고 참회하면 사람들은 곧 그 마음을 받아들여 애민(哀愍)하게 여길 것이니 야인(野人)으로 돌아오면 따뜻한 정으로 바라볼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 죄도 없다 하고 모르쇠로 일관하여 갈 데까지 가보자 하면 애민의 정마저 줄어들까 염려됩니다. 그렇다면 산수간에 마음을 비우고 노닐 수 있는 임고행즉(林皐幸卽)조차 어렵지 않은가 생각됩니다.

많은 사람들은 사람들은 욕됨에 이르러서가 아니라 산수간에 나아가 살고 싶어 합니다. 다사다망하고 경쟁하며 사는 복잡한 도시를 떠나 공기 좋고 인심 좋은 한적한 시골에 살고 싶은 마음은 모두가 갖는 여망일 것입니다. 그러나 이를 실현하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요? ^^

끝으로 고려의 선승이셨던 나옹선사(懶翁禪師)의 선시를 소개하고 마칠까 합니다.

靑山兮要我以無語 청산혜요아이무어

蒼空兮要我以無垢 창공혜요아이무구

聊無愛而無憎兮 요무애이무증혜

如水如風而終我 여수여풍이종아

청산은 나를 보고 말없이 살라 하고

창공은 나를 보고 티없이 살라 하네.

탐욕도 벗어 놓고 성냄도 벗어 놓고

물같이 바람같이 살다가 가라 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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