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슴으로 읽는 한시] 가볍게 짓다
안대회 성균관대 교수·한문학
가볍게 짓다
맑은 개울 가까이 두고 집을 정하니
방문 열면 작은 연못 마주 보인다.
창이 훤해 푸른 산이 자리에 들고
처마 짧아 빗발이 책상에 튄다.
기분이 내킬 때면 천지가 광활해도
하는 일 없어서 세월은 길어라.
시 쓰고 술 마시는 버릇만 남아
늙어가며 미친 짓이 한결 더 심해진다.
漫題
卜地依淸澗(복지의청간)
開軒對小塘(개헌대소당)
窓虛山入座(창허산입좌)
簷短雨侵牀(첨단우침상)
得意乾坤闊(득의건곤활)
無營日月長(무영일월장)
唯餘詩酒習(유여시주습)
老去益顚狂(노거익전광)
선조 연간의 시인 권필(權韠·1569~1612)의 시다. 평생을 얽매인 데 없이 자유롭게 살다보니 속된 것들과 자주 부딪치고 생계가 넉넉하지 못하다. 개울가에 집을 장만했더니 문을 열면 바로 작은 호수가 눈에 들어온다. 창이 넓어 산이 훤히 보여서 좋으나 추녀가 짧아 빗물이 방 안에까지 들어와서 마뜩하지 않다. 기분이 좋을 때는 넓은 천지가 온통 내 세상처럼 느껴지지만 그것도 잠시, 할 일이 없어 무료한 세월을 보내는 인생이다. 버리지 못한 것은 시 쓰고 술 마시는 버릇, 내 멋대로 살아가는 결기와 자유를 나이 들어 간다고 포기하지 않으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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