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슴으로 읽는 한시] 갑산과 헤어지고
안대회 성균관대 교수·한문학
갑산과 헤어지고
마음이 너무 슬퍼
맨 정신으로 도저히 못 헤어지고
술에 취해 헤어진 뒤
깨고 나선 슬픔만 더해지네.
성 위의 높다란 망루며
성안의 큰 나무여!
강을 건너면서
머리 돌려 작별도 못 했구나!
別夷山
心悲不敢醒時別(심비불감성시별)
醉別醒來只益悲(취별성래지익비)
城上高樓城裏樹(성상고루성리수)
未曾回首過江時(미증회수과강시)
초원(椒園) 이충익(李忠翊·1744~1816)이 1779년 봄에 현재의 북한 갑산군을 떠나며 지었다. 1755년 을해옥사(乙亥獄事)에 연루돼 그의 생부는 영남 기장으로, 양부는 갑산으로 유배됐다. 그때부터 그는 국토의 남북 양끝을 오가며 봉양의 세월을 무려 20년 넘게 보냈다. 1778년 11월 양부가 유배지에서 사망하자 다음해 봄 고향으로 시신을 모시며 드디어 갑산과 영이별했다. 갑산은 악몽 같던 청춘을 소비한 끔찍한 곳. 그러나 사람도 풍경도 담뿍 정이 들었다. 만감이 교차하여 맨 정신으로는 떠날 수 없다. 이별주를 마다 않고 마셔 만취한 채 떠나고 말았다. 깨고 나니 오히려 더한 슬픔이 밀려온다. 내 힘겨운 청춘을 지켜보던 망루며 나무에게 마지막 인사조차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기가 막힌 젊은 날의 풍경이 너무도 초초(草草)하게 가슴속에 묻히고 말았다.
'가슴으로 읽는 한시' 카테고리의 다른 글
[가슴으로 읽는 한시] 상고대 (0) | 2021.03.14 |
---|---|
[가슴으로 읽는 한시] 낙지론 뒤에 쓴다 (0) | 2021.03.14 |
[가슴으로 읽는 한시] 섬강에서 (0) | 2021.03.13 |
[가슴으로 읽는 한시] 매화 (0) | 2021.03.13 |
[가슴으로 읽는 한시] 비가 개었다 (0) | 2021.03.1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