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슴으로 읽는 한시

[가슴으로 읽는 한시] 상고대

bindol 2021. 3. 14. 05:23

[가슴으로 읽는 한시] 상고대

안대회 성균관대 교수·한문학

 

상고대

강가의 천 그루 만 그루 나무
하룻밤 새 모조리 백발노인 됐구나!
같은 기를 받아선지 다 함께 어울리고
거장의 솜씨라서 조각도 빼어나네.
솜처럼 하얗게 바람결에 흔들리고
한기에 시린 가지 햇살 받아 붉다.
물러나 늙을 몸이 세상에 보탬 될까?
깊숙이 틀어박혀 풍년이나 즐겨보자.

 

 

 

詠木氷江邊千萬樹(강변천만수)
一夜盡成翁(일야진성옹)
投合緣同氣(투합연동기)
雕鎪賴鉅工(조수뇌거공)
輕搖風絮白(경요풍서백)
寒透日華紅(한투일화홍)
退老身何補(퇴로신하보)
深居樂歲豐(심거락세풍)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1762 ~1836)이 마흔 살 무렵 늦겨울의 양수리 집에서 읊었다. 이른 아침 밖을 나와 보니 하룻밤 새 나무가 모두 백발노인이 되었다. 강가라서 자주 상고대 현상이 나타나지만 온통 같은 빛깔로 나무마다 기기묘묘한 형상이다. 조물주의 위대함이 절로 느껴진다. 그것도 잠깐, 바람결에 나부끼고 한기에 시린 가지에 연민의 감정이 든다. 상고대를 보노라니 이제부터는 세상에서 조용히 물러나 사는 법을 배워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이 시는 정조의 국장(國葬)을 치른 직후에 지었다. 상고대는 옛날에는 '목빙(木氷)'이라 부르며 좋지 못한 징조로 여겼다. 지은이의 슬픔과 불안, 우울함이 상고대 풍경에 깊이 투영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