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슴으로 읽는 한시

[가슴으로 읽는 한시] 소회를 쓰다

bindol 2021. 3. 14. 05:26

[가슴으로 읽는 한시] 소회를 쓰다

안대회 성균관대 교수·한문학

 

 

소회를 쓰다

 

30년 세월 공문서 만지며
관공서를 집으로 여기느라
태창에서 배급하는 묵은 쌀에
곤경도 많이 겪었네.

노쇠한 나이에
뿌리로 돌아가는 낙엽 신세여도
젊은 시절에는
똥구덕에 떨어지는 꽃잎이라 슬퍼했지.

떠나는 동료를 연민한
옛 사람의 글을 따분해했더니
가난을 즐기는
이웃 친구의 노래를 즐겨 듣게 됐네.

날씨 추워진 대지를
얼음이 뒤덮으려 할 때
자벌레는 깊이 숨어
흙구덩이에 엎드려 있네.

 

 

寫懷卅載簿書官作家(삽재부서관작가)
太倉紅粒困人多(태창홍립곤인다)
衰年自作歸根葉(쇠년자작귀근엽)
少日曾悲墮溷花(소일증비타혼화)
懶讀昔賢歎逝賦(나독석현탄서부)
耽聽隣友樂貧歌(탐청인우낙빈가)
天寒大地氷將結(천한대지빙장결)
尺蠖深藏伏土窠(척확심장복토과)

 

 

조선 후기 여항시인(閭巷詩人) 쌍백당(雙柏堂) 임광택(林光澤·1714~1799)이 하급 관료 생활을 마칠 무렵에 썼다. 무려 30년 세월 동안 태창(太倉·관원들의 녹봉을 맡아보던 관청)의 묵은 쌀을 급료로 받으며 견뎠다. 한창 젊은 시절 남들이 잘 나가는 것을 보면서 나는 하필 똥 구덕에 구르는 꽃잎 처지가 되었는지 안타까워한 적도 있었다. 이 자리를 퇴직해 떠나던 선배들을 보내며 나는 그들과 다를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나도 떠나서 이제는 그들처럼 가난을 감내할 시간이 다가왔다. 날이 추워져 대지가 얼어붙자 자벌레는 흙구덩이로 숨어든다. '주역(周易)'에서는 말했다. "자벌레가 몸을 구부리는 것은 장차 몸을 펴기 위해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