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슴으로 읽는 한시

[가슴으로 읽는 한시] 섣달 그믐날

bindol 2021. 3. 14. 05:43

[가슴으로 읽는 한시] 섣달 그믐날

안대회 성균관대 교수·한문학

 

 

섣달 그믐날

 

해는 가도 나 죽은 뒤에
다시 또 돌아오고
풍경은 전과 똑같고
초당은 한적하겠지.
남은 자들 속에서는
멋진 사람 찾기 어려워
혼백인들 이 세상을
무엇 하러 그리워하랴?
술꾼의 자취 서린 무덤
그 위로 계절은 지나가고
시인의 명성 남은 옛집
강산만은 지켜주겠지.
낙화유수 인생이라
한평생 한이러니
세상만사 유유하다
상관 않고 버려두리라.

 

 

除夕(제석)歲去應吾死後還(세거응오사후환)


風光依舊草堂閒(풍광의구초당한)
典型難覓餘人裏(전형난멱여인리)
魂魄寧思此世間(혼백영사차세간)
酒跡荒墳隨節序(주적황분수절서)
詩名故宅有江山(시명고택유강산)
落花流水平生恨(낙화유수평생한)
一切悠悠摠不關(일절유유총불관)

 

―이만용(李晩用·1792~1863)

19세기 전반의 시인 동번(東樊) 이만용이 한 해가 저물어갈 무렵에 썼다. 다산 정약용의 맏아들이자 절친한 시 벗이었던 정학연(丁學淵)에게 새해를 앞두고 기념 삼아 준 작품이다. 희한하게 해가 바뀌어도 세상은 달라지지 않는다는 인생의 무상함을 자신의 죽음이란 설정으로 드러낸다. 내가 세상을 뜨는 청천벽력같은 일이 벌어져도 새해는 다시 오고 내가 없는 세계는 풍경 하나 달라지지 않는다. 세상에 미련이 남아있느냐고? 남아있는 사람 중에는 번듯한 자를 찾아보기 힘들기에 넋이라도 이 세상을 다시 찾고 싶지 않다. 삶의 애환이 서려 있는 무덤과 집과 그 밖의 곳곳에도 무정한 세월과 강산만이 지켜볼 뿐, 남아서 살아가는 그 누가 관심을 기울일까? 이제 세상에 큰 기대 걸지 말자. 인생이란 낙화유수(落花流水), 미련 버리고 되어가는 대로 내버려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