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슴으로 읽는 한시] 섣달 그믐에
안대회 성균관대 교수·한문학
섣달 그믐에
도성에는 열 길 높이 부연 먼지 떠오르며
명예 다투고 이익 좇아 동과 서로 뛰어다니네.
정말 이상하다 우리 집안 형님들은
그 바쁜 세상에서 담백한 모임 가지네.
담백한 모임은 거듭 하면 깊은 맛이 우러나나
바쁜 일은 겪고 나면 흔적조차 사라지네.
매화 모임 하고 나자 그믐날의 술자리
차례대로 즐기면서 끝없이 이어가리.
除夕飮(제석음)
城塵十丈浮軟紅(성진십장부연홍)
爭名射利汨西東(쟁명사리골서동)
獨怪吾宗諸夫子(독괴오종제부자)
作閑淡事熱閙中(작한담사열료중)
閑淡積來味啖蔗(한담적래미담자)
熱?B經盡迹飛鴻(열료경진적비홍)
梅花會後除夕飮(매화회후제석음)
次第取樂眞無窮(차제취락진무궁)
―조귀명(趙龜命·1693~1737)
조선 영조 초반기의 이름난 문장가인 동계(東谿) 조귀명이 섣달 그믐에 썼다. 가까운 친척들이 연말이면 모여서 매화를 감상하는 매화회(梅花會)를 열고, 이어서 그믐날에는 한해를 보내며 술을 마시는 제석음(除夕飮)을 열었다. 매화가 없으면 빌려서라도 즐겼다. 젊고 여유롭던 시절이라 친척들과 어울림은 즐거웠다. 경쟁에 여념이 없는 바쁜 세상에서 누리기 힘든 그 모임은 맛으로 표현하자면 깊이 우러나는 담백한 맛이다. 그러나 나이 들고 하나 둘 세상을 뜨고 바쁘게 살면서 모임은 이어지지 못했다. 지나고 보면 바쁜 인생은 흔적조차 남기지 않는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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