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00여 년 전 인도에서 수학 역사상 가장 드라마틱한 사건이 있었다. 숫자에서 영(zero)의 발명이다.
왜 하필 인도에서 그런 일이? 연유(緣由)가 있겠다. 2600여 년 전 지금의 네팔인 인도 북부 룸비니에서 고다마 싯다르타가 석가족 왕자로 태어났다. 그는 35세에 연기(緣起)법을 깨달아 부처(佛陀)가 되었다. 부처 사후 불교는 고도로 추상화된다. 많은 종교 중에서 불교는 인간의 추상적 사유가 가장 방대하며 난해하게 전개된 철학이다. 불학의 근본은 공(空) 사상이다. 영화 제목이 될 정도로 잘 알려진 불교 명구인 색즉시공(色卽是空)은 실체가 있는 색(色)이나 실체 없이 빈 공(空)이나 다 똑같다는 뜻이다. 비어 있으니 변함없이 똑같은 자기자신도 없고(無我), 늘 항상 언제나 똑같은 세상만물도 없다(無常). 2500여 년 전 노자의 무위(無爲) 사상도 빈 공(空)처럼 빈 허(虛) 사상을 근본으로 한다. 결국 공, 무, 허 사상의 최초 근원지인 인도에서 아무 것도 없는 숫자인 0(零)이 생겼으니 이는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영(zero)을 사용해 얼마든지 큰 숫자도 나타낼 수 있었다. 이는 로마숫자에서처럼 1, 5, 10, 50, 100, 500, 1000을 Ⅰ, Ⅴ, Ⅹ, L, C, D, M으로 써서 생기는 복잡함, 불편함, 비효율, 한계성을 단번에 벗어나는 길이었다.
0의 발명은 수학이 도약할 수 있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그 사건이 추상적 논리를 펴는 수학과 추상적 사유를 하는 불학의 만남이라 생각하니 세상사 참 연기(緣起)적이다. 말미암아(緣) 일어나는(起) 연기법에서 자유로운 건 이 세상에 단 한 점도 없다.
박기철 경성대 광고홍보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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