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보나치(1170~1250)가 없었더라면 중세 유럽의 수학은 거의 전무할 뻔했다.
당시 십자군 원정의 전진기지였던 이탈리아 피사에서 태어난 피보나치는 아랍권 나라들을 다니면서 그들이 쓰던 0의 가치를 알아챘다. 인도에서 수냐(sunya), 아랍에서 시프르(sifr)였던 영을 제로(zero)라 부르는 것도 그로부터 시작한다. 셈하고 쓰기 복잡한 로마숫자에 비해 0을 쓰는 위치기수법 체계는 간편했다. 0를 바탕으로 쓴 '주판서'는 주판(珠板)으로 셈하는 방법이다. 이 책이 실용적 산술책으로 머물렀다면 그는 유럽으로 0을 전달한 단순 중개자로만 남았을 것이다. 피보나치는 수학자 이전에 관찰자였다. 그는 세상만물이 수로 이루어졌다고 주장한 피타고라스의 계승자였다. 주판서에 피보나치 수열이 언급된 이유다. 1 1 2 3 5 8 13 21…∞. 앞의 숫자들과 똑같은 방식으로 21 다음에는 앞의 13을 더해 34다. 등비도 등차수열도 아닌 이 독특한 수열은 단순하면서 신비하다. 신비함의 요체는 비율이다. 한 숫자에서 그 전의 숫자를 나누면 숫자가 커갈수록 1.618에 가깝게 다가간다. 1 : 1.618 황금비율이다. 네 잎의 클로버가 귀한 이유는 4가 피보나치 수열에 없어서다. 꽃잎의 수, 조개껍데기의 나선형 비율 등에 다채롭게 나타나는 피보나치 수열의 황금비율은 경이를 넘어 경외롭다. 이 경외로운 자연의 법칙을 본따 인간도 담뱃갑, 복사지 등의 가로 : 세로 길이를 황금비율에 따라 만든다.
'道生一, 一生二, 二生三, 三生萬物!' 도는 1을, 1은 2를, 2는 3을, 3은 만물을 낳는다. 노자의 이 구절에 이어 3 다음에 오행, 5 다음에 팔괘도 피보나치 수열이다. 놀랍고 놀랍다.
박기철 경성대 광고홍보학과 교수
'박기철의 낱말로 푸는 인문생태학' 카테고리의 다른 글
[박기철의 낱말로 푸는 인문생태학]<190> 허虛 무無 공空 영零; 수학의 도약 (0) | 2021.04.17 |
---|---|
[박기철의 낱말로 푸는 인문생태학]<191> 알고리즘과 알지브라 ; 아랍의 수학 (0) | 2021.04.17 |
[박기철의 낱말로 푸는 인문생태학]<193> 사개치부와 복식부기; 파급력은? | (0) | 2021.04.17 |
[박기철의 낱말로 푸는 인문생태학]<194> 지수와 대수; log는 뭘까? (0) | 2021.04.17 |
[박기철의 낱말로 푸는 인문생태학]<195> 수학자와 철학자; 네 인물의 차이 (0) | 2021.04.1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