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기철의 낱말로 푸는 인문생태학

[박기철의 낱말로 푸는 인문생태학]<108> 글 그림 그리움 ; 다 똑같은 행위

bindol 2021. 4. 19. 04:54

 

세 낱말은 다 긁어서 이루어진 것이다. 어디에 무엇을 긁느냐가 다를 뿐.

글이란 머릿속에 가진 생각을 종이에 긁는 것이다. 한자로 글을 뜻하는 서(書)는 붓(聿)으로 사람의 말(曰)을 긁은 것이다. 요즘은 컴퓨터 키보드로 모니터에 쓰고 프린터에 긁어 출력하지만 글이란 자신의 생각이나 다른 사람의 말을 종이에 긁은 것이다. 인류가 말을 글로 기록하기 시작했다는 것은 선사시대와 역사시대를 구분하는 획기적 전환점이다. 글의 수단인 문자의 기원은 그림이다. 코끼리와 같은 어떤 상(象)의 모양(形)을 나타내는 상형문자(pictograph)다.

나일 문명이나 메소포타미아 문명에 있었던 5000~6000여년 전의 문자는 모두 긁어서 그린 그림이었다. 황하문명을 이룬 중국 최초의 한자인 갑골문도 거북의 배(甲)와 소의 어깨쭉지 뼈(骨)에 긁은 무늬(文) 그림인 상형문자다. 그림을 뜻하는 화(畵)도 밭(田)의 모양을 붓(聿)으로 긁어 그린 글자다. 인더스 문명의 유물에서 발견된 그림들도 이미지를 긁어서 그린 상형문자다. 사실화든 추상화든 요즘 그림들도 모두 마음속에 가진 생각이나 현실 속의 모습을 화폭에 긁어서 그린 작품들이다.

글과 그림이 종이나 화폭에 긁어 그린 것이라면 그리움은 마음에 긁어서 그린 것이다. 누군가가, 무언가가 그립다면 마음에 긁게 된다. 그리움과 관련되는 한자인 상(想), 염(念), 사(思)에 공통적으로 마음(心)이 들어 있는 것을 보면 마음에 긁은 그리움이 쉽게 이해된다.

호모 사피엔스인 인간을 호모 스크래터스라 해도 될까? 인간만이 종이에 긁어(scratch) 글을 쓰고 화폭에 긁어(scrape) 그림을 그리니까. 특히 카드를 긁고 사는 현대인이기에. 하지만 동물도 그리움을 가질 수 있기에 호모 스크래터스라고 감히 단언하지는 못한다.

경성대 광고홍보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