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값 가(貝-6)옳을 의(言-8)고칠 개(攵-3)바꿀 혁(革-0)
천하를 一統(일통)한 秦(진) 제국은 불과 15년 만에 무너졌고, 다시 들어선 漢(한) 제국 또한 쉽게 안정을 찾지 못했다. 高祖(고조) 劉邦(유방)이 통치할 때도 곳곳의 諸侯王(제후왕)들이 謀叛(모반)하고 또 북방의 흉노가 남하하여 불안과 위기가 지속되었는데, 고조 사후에는 呂太后(여태후)가 권력을 잡고 呂氏(여씨) 일족이 전횡을 일삼는 바람에 위기가 더욱 고조되었다.
이윽고 여태후가 죽자 太尉(태위) 周勃(주발)과 丞相(승상) 陳平(진평) 등이 여씨 일족을 제압하고 代王(대왕)으로 있던 고조의 넷째 아들 劉恒(유항)을 맞아들여 옹립했다. 그가 제국의 기틀을 다지며 안정적으로 통치한 文帝(문제)다.
문제는 제국에 걸맞은 새로운 정치 제도를 마련하고 사회의 기강을 확립해야 하는 난제를 떠맡았다. 더구나 이를 정치적 기반이 취약한 상태에서 대신들과 제후왕들의 눈치를 보면서 실행해야 했으므로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따라서 경륜과 행정 능력을 갖춘 인재가 절실하게 요구되었는데, 그때 두각을 나타낸 이가 賈誼(가의, 기원전 200∼168)다.
가의는 유가사상을 토대로 개혁적인 정책을 개진했다. 법령을 간략하게 하고 형벌을 줄여야 하며, 重農抑商(중농억상) 정책을 통해 사회의 안정과 부를 축적해야 하며, 장안에 거주하면서 권세를 부리던 제후들을 각자의 封地(봉지)로 돌아가게 하여 제후들의 세력을 약화시켜야 하며, 흉노를 무력화시키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 방책을 써야 한다는 등 개혁안을 내놓았다.
그러나 주발 등 대신들이 "나이도 어리고 학문도 얕은데, 권력을 독점해서 일을 어지럽히려 한다"며 강력하게 반대했고, 문제도 이를 무시하지 못하여 결국 가의를 멀리해야 했다.
그럼에도 문제는 가의의 개혁안을 완급을 조절하며 적절하게 실행하여 통치의 기반을 다지고 대내외적으로 안정된 정치를 펼칠 수 있었다.
가의의 사상과 정책에 대해서는 그의 글들을 모아 놓은 '新書(신서)'를 통해 알 수 있다. '신서'를 보면, 물자 비축과 화폐 주조에 관한 문제나 풍속을 바로잡는 일, 제후와 흉노의 문제 등 당시의 주요한 문제들부터 정치와 학문, 예법 따위에 이르기까지 다루지 않은 게 거의 없다. 가의의 사상은 간단히 말해 仁義(인의)와 禮樂(예악)을 바탕으로 法家(법가)의 통치술을 아우른 것이었다. 그 사상은 陸賈(육가)의 사상과 더불어 한 제국이 유교국가가 되는 데 크게 기여했다. 이는 '大學(대학)'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실마리가 되는 사실이기도 하다.
고전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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