굳셀 무(止-4)임금 제(巾-6) 클 태(大-1)배울 학(子-13)
漢(한) 제국을 안정시킨 文帝(문제)는 학문하는 선비를 등용하기는 했으나, 그리 적극적이지는 않았다. 이어 제위에 오른 景帝(경제)는 강성해진 제후들을 굴복시켜야 하는 입장에 있었으므로 仁義(인의)의 정치를 펼 겨를이 없었다. 경제는 즉위 3년째에 일어난 '吳楚七國(오초칠국)의 난'을 제압하기 위해 자신이 아끼던 대부 晁錯(조조)를 서슴없이 희생시킬 정도로 냉철하고 냉혹한 군주였다. 그는 법가적 군주의 성향이 강했다.
이윽고 경제를 이어 즉위한 武帝(무제, 기원전 141∼87 재위)가 儒學(유학)에 관심을 가지고 유학에 밝은 선비들을 대거 기용했다. 이때 重用(중용)되어 유학이 정치 이념으로 자리 잡을 수 있게 한 인물이 公孫弘(공손홍, 기원전 200∼121)과 董仲舒(동중서, 기원전 176∼104)다. 특히 동중서는 다른 학파의 학문들을 물리치고 오로지 유학을 중시하는 '罷黜百家, 獨尊儒術(파출백가, 독존유술)'의 정책을 펴도록 강력하게 주장한 인물이다. 동중서를 통해 유학은 국가의 이데올로기가 되고 나아가 제도로 정착되기에 이르렀다.
'漢書(한서)'의 '董仲舒傳(동중서전)'에 '立大學以敎於國, 設庠序以化於邑'(입대학이교어국, 설상서이화어읍)이라는 구절이 나온다. "태학을 세워 도성 안에서 가르침을 펴고, 상서를 만들어 고을에서 교화를 편다"는 뜻이다. 무제는 '시경' '상서' '예기' '주역' '춘추'의 五經(오경)을 중시하여 각각에 博士(박사)와 博士弟子(박사제자)를 두었으며, 이와 더불어 관리 양성을 위해 太學(태학)을 설립했다. 이는 공손홍과 동중서의 건의에 따른 것이었다.
태학은 관리 양성을 위한 국립대학으로, 교육과 정치가 어우러지는 곳이다. 이는 학문이 실제로 정치를 통해 세상에 쓰이는 것임을 의미하며, '대학'이 지향하는 바이기도 하다. 大學(대학)이 본래 학문이면서 교육기관을 나타내는 말이었고, 교육기관을 가리킬 때는 '태학'으로 읽혔다는 사실에서도 확인된다.
오늘날 한국의 대학은 어떠한가? 과연 큰 학문이 이루어져 미래를 책임질 棟樑之材(동량지재)를 배출하고 있는가? 대학 진학률이 세계 1위라고 하는데, 이토록 沒常識(몰상식)과 非正常(비정상)이 만연한 까닭은 무엇인가? 학문과 인생의 스승은 드문 채 제 밥그릇만 챙기는 교수들이 득시글거리고, 자잘하게 학점에만 매여서 깊은 성찰은 없이 오로지 취직만 고민하는 젊은이들로 가득해서가 아닐까?
'대학'을 주목하고 깊이 음미해야 하는 까닭이 여기에도 있다.
고전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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