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천구의 대학에서

정천구의 대학에서 정치를 배우다 <44> 知人之鑑

bindol 2021. 6. 1. 05:43

알 지(矢-3)사람 인(人-0)갈 지(丿-3)거울 감(金-14)

 

'관자'의 '大匡(대광)'편을 보면, 환공은 패왕이 되는 목표를 가진 적이 없고 사직을 안정시키는 것에서 만족하려 했다고 한다. 환공 이전에는 패왕이 없었고 또 제나라가 오랫동안 혼란했다는 점을 감안하면, '관자'의 내용은 꽤 타당해 보인다. 그러나 환공이 패왕이 되고 싶어했든 어쨌든 간에 중요한 것은 환공이 관중을 기용해서 크게 썼다는 사실이며, 그뿐만 아니라 포숙을 비롯해서 寧戚(영척), 隰朋(습붕), 賓胥無(빈서무) 따위 현명한 신하들을 기용하고 또 널리 인재를 찾아서 적절한 자리를 주어 사직을 안정시키고 나아가 패자가 되어 천하를 호령했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환공의 주위에는 군주를 가까이에서 모시려고 스스로 거세한 豎刁(수조), 자식을 삶아서 군주에게 먹인 易牙(역아), 친족과 인연을 버리고 제나라로 온 開方(개방) 같은 소인배도 있었다. 이들은 죽음을 앞둔 관중이 환공에게 반드시 멀리 내쳐야 할 자들이라고 간곡하게 일러두었던 자들이다. 그러나 관중을 비롯한 현명한 신하들이 정치를 맡아서 제나라를 이끌어 가는 동안에는 환공도 그들의 아첨에 휘둘리지 않았다. 그들이 있지도 않은 일을 들먹이며 관중을 헐뜯을 때도 한결같이 관중을 믿고 두둔했다.

그렇지만 관중이 죽은 뒤, 환공의 판단은 급속히 흐려졌다. 저 소인배들을 처음에는 멀리했으나, 결국 가까이 두었다. 그게 그들이 여러 공자들을 서로 끼고 권력 다툼을 벌이는 빌미가 되었으며, 끝내 환공 자신도 침실에 갇혀서 굶어죽는 지경에 이르렀다. 공자들이 서로 권력을 차지하느라 여념이 없는 동안에 환공의 주검은 두 달 동안 침상에 그대로 내버려진 채 썩어서 구더기가 나올 지경이었다고 한다. 중원을 호령하던 패왕의 최후치고는 참으로 처참했다. 그리고 관중이 다스리던 30여 년 동안에 모든 제후국들 위에서 군림하던 제나라는 이내 혼란을 겪었다.

환공은 보위에 오른 뒤로 인재를 발탁하여 일을 맡겼으며, 소인배들에게 휘둘리지도 않았다. 그만큼 사람을 보는 눈, 곧 知人之鑑(지인지감)이 있었다. 그런데 어찌하여 관중이 죽은 뒤에는 그토록 허망하게 소인배들의 농간에 놀아나게 되었을까? 자신도 모르는 새에 그들의 아첨에 오래도록 젖어 있었기 때문일까? 환공이 죽을 때 나이가 일흔 셋이었다고 하는데, 노망이 들었던 것일까? 아니면, 환공이 진즉에 후사를 정해놓지 않았기 때문일까? 근본적인 이유가 무엇이든 간에 환공이 처음처럼 끝을 삼가지 못하고 스스로 마무리를 제대로 하지 못했다는 것이 제나라를 다시 나락으로 떨어뜨린 꼬투리로 작용했다는 점은 분명하다.

고전학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