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천구의 대학에서

정천구의 대학에서 정치를 배우다 <161> 君無見其意

bindol 2021. 6. 5. 04:20

임금 군(口-4)하지 말 무(火-8)보일 견(見-0)그 기(八-6)뜻 의(心-9)

 

'한비자' '主道(주도)'에 나온다. "君無見其所欲, 君見其所欲, 臣自將雕琢; 君無見其意, 君見其意, 臣將自表異."(군무견기소욕, 군견기소욕, 신자장조탁; 군무견기의, 군견기의, 신장자표이) "군주는 자신이 바라는 것을 드러내서는 안 되는데, 군주가 자신이 바라는 것을 드러내면 신하는 군주가 바라는 대로 보이려고 꾸민다. 군주는 자신의 뜻을 드러내서는 안 되는데, 군주가 자신의 뜻을 드러내면 신하는 제 속내는 숨기고 군주의 뜻에 맞추려 한다."

이렇게 보면, 군주 노릇은 참으로 힘들다. 실제로 여간해서는 감당하기 어렵다. 군주도 사람인지라 감정이 있고 성깔이 있는데, 이를 스스로 잘 다스리고 추스를 수 있어야만 곤욕을 치르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아무리 군주라도 제 감정을 다 드러내고 성깔대로 하려 들면, 그때를 노리는 소인배나 간신배의 농간에 놀아나기 십상이다.

역사적으로 聖君(성군)은 제쳐두더라도 賢君(현군)조차 드문 이유가 그 때문이다. 속된 말로 "잘해야 본전인 것"이 군주 노릇이다.

조선 세종 때 일이다. 지방 수령의 임기와 관련된 논란이 있었다. 30개월이던 수령 임기를 60개월로 늘리는 六期法(육기법) 문제였다. 결국 임기가 짧으면 수령이 자주 교체되어 지방을 안정시키는 데 이롭지 못하다는 판단에서 개혁을 단행했으나, 지방으로 내려가기를 꺼리는 것이 관료의 생리인지라 육기법을 시행한 뒤에도 불만을 표출하는 관료들이 적지 않았다. 다음은 그 때문에 일어난 일이다.

세종 22년인 1440년 3월 18일의 어전회의였다. 세종과 신료들이 모두 좌정해 있었는데, 호조참판 高若海(고약해)가 자리에 앉지 않고서 "小人(소인)!"이라고 중얼거렸다. 그 순간, 세종의 얼굴에서 웃음이 사라졌다. 임금 앞에서는 '小臣(소신)'이라 해야 함에도 '소인'이라 한 것이다.

세종이 말했다. "큰소리로 말하라!" 고약해가 머뭇거리며 말했다. "소인이 오랫동안 天顔(천안, 임금의 얼굴)을 뵙지 못하여 일을 아뢰고자 해도 하지 못했습니다." "해로울 것 없으니, 우선 말하라."

고약해는 기다렸다는 듯이 말했다."소인의 충성이 부족해 天意(천의, 임금의 마음)를 돌리지 못하고 있습니다만, 신이라도 말하지 않는다면 누가 감히 전하를 위해 말하려 하겠습니까?"

고전학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