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닐 불(一-3)알 지(矢-3)만족할 족(足-0)
‘순자’ ‘榮辱(영욕)’에 다음 대목이 나온다.
“人之情, 食欲有芻豢, 衣欲有文繡, 行欲有輿馬, 又欲夫餘財蓄積之富也. 然而窮年累世不知足, 是人之情也.”(인지정, 식욕유추환, 의욕유문수, 행욕유여마, 우욕부여재축적지부야. 연이궁년누세부지족, 시인지정야)
“사람의 성정은 음식은 쇠고기나 돼지고기를 먹으려 하고, 의복은 무늬를 수놓은 비단 옷을 입으려 하며, 길을 다닐 때는 수레와 말을 타려고 하고, 또 남은 재물과 쌓아 놓은 것이 넉넉하기를 바란다. 그러나 해가 다 가고 세대를 거듭해도 만족할 줄을 모르니, 이것이 사람의 성정이다.”
순자는 사람에게 욕구가 있음을 인정했다. 실제로 공자나 맹자도 이런 욕구를 인정했다. 공자의 예악 사상도 맹자의 인의와 왕도도 이를 바탕으로 한다. 사람의 타고난 욕구를 부정했다면, 결코 유가의 철학은 나올 수 없었다. 사람의 욕구를 인정하지 않고 도리어 타기해야 할 대상으로 간주한 것은 후대 성리학자들의 횡포임을 알아야 한다.
어쨌든 욕구는 채워야 마땅한데, 채워지지 않으면 더욱 강렬해지고 채우면 채우는 대로 더욱 커진다. “해가 다 가고 세대를 거듭해도 만족할 줄을 모른다”는 말이 그런 뜻을 담고 있다. 아니, 만족할 줄 모르는 데서 그치지 않고 더 강렬해지고 더 커진다. 더 강렬해지고 더 커지면, 그때는 욕구가 아니라 탐욕이 된다.
대부분의 사람은 이런 이치를 모르거나 간과하다가 스스로 탐욕의 노예가 되어 자신을 망치고 집안을 어지럽힌다. 욕구를 자연스러운 것으로만 여긴 탓에 조절해야 한다는 사실을 망각했기 때문이다.
흔히 예의 또는 예법을 사람의 마음이나 감정을 억누르는 것으로만 아는데, 전혀 그렇지 않다.
만약 예의가 억누르는 구실만 한다면, 도대체 법가의 형벌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예의의 본령은 마음이나 감정이 지나치거나 모자라지 않도록 스스로 잡도리하도록 일깨우는 데 있지, 억누르는 데 있지 않다.
다시 말하면, 예의는 욕구를 지나치지도 않고 모자라지도 않게 ‘알맞게’ 채우도록 해주는 구실을 한다.
고전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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