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천구의 대학에서

정천구의 대학에서 정치를 배우다 <217> 季文子

bindol 2021. 6. 6. 04:31

- 성 계(子-5)무늬 문(文-0)임 자(子-0)

 

앞의 문답은 맹자가 易姓革命(역성혁명)을 주장했다는 근거다. 비록 춘추시대보다 훨씬 뒤인 전국시대에 맹자가 제후와 주고받은 문답이지만, 춘추시대에도 이미 이런 생각을 한 대부나 선비들이 적지 않았다고 볼 수 있다. 다만 맹자처럼 대놓고 말하지 못했을 뿐이다.

전국시대가 晉(진)나라의 멸망이라는 사건, 즉 성씨가 다른 대부 집안이 공실을 무너뜨리고 스스로 군주의 자리를 차지한 사건에서 시작된 것을 보아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는 일이 아닐까?

어쨌든 춘추시대에는 그나마 경대부의 집안이 분수를 알고 참람한 짓을 저지르지 않으면서 공실을 떠받들었다. 그것이 오히려 자연스럽게 민심을 얻는 계기가 되었으니, 참으로 아이러니하다. ‘國語(국어)’의 ‘魯語(노어)’에도 그런 사례가 적지 않게 나오는데, 두 가지만 들어보겠다.

첫 번째 이야기다. 季文子(계문자)는 노나라 宣公(선공, 기원전 609∼591 재위)과 成公(성공, 기원전 591∼573 재위) 2대에 걸쳐 재상을 지냈다.

그런데 그의 첩은 비단옷을 입지 않았고, 그의 말도 좋은 여물을 먹지 않았다. 孟獻子(맹헌자)의 아들인 仲孫它 (중손타)가 그에게 충고했다.

“그대는 노나라의 上卿(상경)으로 2대에 걸쳐 재상을 지냈는데, 첩은 비단옷을 입지 않고 말은 좋은 여물을 먹지 못하고 있으니, 사람들이 그대를 인색하다고 여기며 그대가 나라의 체면을 구긴다고 하지 않겠소?”

계문자가 대답했다.

“나 또한 첩이 비단옷을 입고 말이 좋은 여물을 먹었으면 하오. 그러나 백성들을 보니, 가족이 거친 곡식을 먹고 해진 옷을 입는 사람이 매우 많소. 그래서 내가 감히 그렇게 하지 못하는 것이오. 백성들의 가족이 거친 곡식을 먹고 해진 옷을 입고 있는데도 내가 첩과 말을 아름답게 꾸민다면, 이는 군주를 보좌하는 사람이 할 일이 아니오. 또 나는 ‘덕이 빛나야 나라의 체면도 산다’고 들었소. 첩과 말을 꾸며 나라를 빛냈다는 말은 아직 들어본 적이 없소.”

고전학자